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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강화를 위한 제안/이인호(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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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강화를 위한 제안/이인호(한국논단)

입력
1993.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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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개혁의 진전은 이제 신선한 충격을 넘어 허탈감을 자아내기 시작한다. 경찰이 썩었다,법원이 썩었다,판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로 개업하는 사람은 첫해에 몇억쯤 벌어놓지 않으면 안된다는 등 세간의 말들이 결코 근거없는 것이 아니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지하의 폭력조직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였던 검찰의 거목이 결국은 그들의 망에 걸려들고 말았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조직적 범죄에 대해 무방비 상태에 놓여있었다는 말이 된다.검찰과 사법행정이 존엄과 독자성을 상실하게 된데 대한 큰 설명은 군사독재에 의한 외압 때문에 사법부의 독립성이 상실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정신적으로 대가 강한 사람은 윗자리에 오르기가 어려웠고 검찰이나 재판부의 도덕적 위신이 다같이 실추되었기 때문에 정치범은 물론 시정의 폭력배들이나 사기꾼들 조차도 검사나 판사를 우습게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태에 대한 대응책은 민주사회에서 법이 지니는 중요성에 대한 국민 전반의 의식을 깨우치고,동시에 사법부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제도적 조처를 강구하는 것이다. 그러한 조처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우선 논의의 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법관 임명절차의 개혁과 법학 교육의 대학원 과정으로의 승격방안이다.

우리의 현행제도 아래에서는 누구든 사법고시를 통과하고 사법연수과정을 거치면 거의 자동으로 판사직에 부임하게 되고 대부분 검사나 판사직을 물러난 사람이 변호사로 개업한다. 판검사 또는 변호사가 되는 사람들은 대개 법과대학을 졸업하는 것이 통례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아니고 사실 법대를 다닌 사람들도 입학 직후부터 고등고시와 관계되는 전문분야에 집중적으로 정력을 쏟아야 되기 때문에 그와 무관한 교양과목을 수강할 겨를은 별로 없다. 대학 재학중에 고시에 합격하는 사람은 스무살을 갓 넘자 판사가 된다.

우리의 현행제도는 일제의 군주정치시대부터 그대로 답습되어온 체제이다. 사회전반의 교육수준이 높지 않았고 중등학교까지 교양교육의 내용이 충실했던 그 당시에는 그래도 법학 전문을 나온 사람들은 남보다 월등 높은 학식을 가진 셈이었다. 그러나 대학교육이 보편화되어 있는 반면에 중고등학교의 교양교육 내용은 잘못된 입시제도 때문에 지극히 빈곤해진 오늘의 사정에서는 법대 입학과 동시에 고시준비에만 전념했던 젊은 판사님들은 교양교육수준에서 자칫하면 일반 시민의 수준을 크게 밑돌 염려마저 없지 않다.

인생을 길게 살아본 경험도,문학이나 철학·종교서적을 읽을 겨를도 없던 사람들이 순전히 법조문에 관한 지식과 기존 사법체계속에서의 도제적 수련과정만을 거친후 남의 재산상의 손익은 물론 생사를 가름하는 판결을,그것도 항상 시간에 몹시 쫓겨가며 내려야 되는 것이다. 위로부터의 압력은 물론 세속에 밝은 변호사들이나 재판 당사자들의 농간을 그들이 쉽게 당해 낼 수 없음은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일이다. 사형선고를 내린후 고민에 못이겨 세상을 등졌던 유명한 판사의 이야기는 이미 옛날 일이다.

많은 경우 사법고시는 출세의 지름길로 인식될 뿐인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법과 과정을 대학의 학부를 졸업한 후 이수하는 대학원 과정으로 승격시킨다면 법관들의 지적 수준이 그들의 판결을 받아야 하는 일반 국민의 수준보다 높아지고 재판업무의 전문화 추세에도 도움이 될 뿐더러 가장 작은 투자를 해서 가장 많은 것을 뽑아낼 수 있다는 얄팍한 계산만으로 법복을 입으려하는 사람들을 걸러내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법관후보 교육의 강화 못지 않게 필요한 것이 임명절차의 개혁이다. 법이 존재하는 첫째 이유가 국민의 권리옹호에 있고 입법과 사법과 행정부 사이의 균형과 상호 규제가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되는 민주사회에서는 공익을 옹호하는 검사나 억울한 시민 개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변호사로서 경력을 쌓고 탁월한 능력을 드러낸 사람들 사이에서 판사를 임명하고 국민을 대변하는 입법부의 인준을 받는 것이 현행제도보다 훨씬 합리적인 일이 아닌지 생각해볼만하다. 지금처럼 판사직을 변호사 개업을 해서 돈버는데 필요한 발판쯤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법조인으로서의 생애의 정점으로 높이 사는 사람들,검사나 변호사로서의 업적 때문에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판사로 임명된다면 지금까지처럼 판사들이 정치의 시녀가 되거나 악덕 변호사나 사기꾼들의 노리개로 전락할 염려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사법제도의 강화를 위한 이러한 제안은 민주제도의 올바른 작동과 밀접하게 관계되는 매우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헌법의 개정과도 관련될 수 있는 이러한 일은 시간을 두고 신중한 토의를 거쳐야 할 것이다.<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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