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해는 1860년이고 케네디는 그 1백년뒤인 1960년에 당선됐다. 두사람이 암살된후 대통령직을 계승한 부통령의 이름은 모두 존슨인데,앤드루 존슨은 1808년생이고 린든 존슨은 그로부터 정확히 1백년뒤인 1908년에 출생했다. 링컨을 암살한 부스는 1839년생이고 케네디를 암살한 오스왈드는 1938년생인데,둘다 재판이 열리기전에 다른 범인에 의해 암살됐다.링컨 대통령의 비서 케네디와 케네디 대통령의 비서 링컨은 모두 자기들이 모시던 대통령에게 피살된 곳에 가지 말라고 사전에 극력 만류했다. 부스는 극장에서 링컨을 쏘고 창고로 도주했고,오스왈드는 창고에 숨어서 케네디를 쏜뒤 극장으로 도망쳤다.
미국 사람들에게는 꽤 알려져 있는 얘기지만,과거의 기록들을 더듬어 나가다보면 가끔 이처럼 기묘한 역사의 우연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박철언씨는 슬롯머신업자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지난달 검찰의 소환을 받고 출두하면서 『새벽이 왔다면서 닭의 목은 왜 비트는가』라고 항변했다. 김영삼대통령이 야당시절 정치탄압을 당할 때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다짐하던 것을 반어로 야유한 셈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후 가택연금됐던 김 대통령에게 정부의 해금조치에 따라 정치활동 재가가 허용됐을 당시,지금은 대통령 부인이 된 손명순여사는 한 인터뷰(한국일보 85년 3월7일자)에서 30년 야당 정치인의 아내로서 겪어온 힘들었던 세월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분(김 대통령)이 늘 말하는 것을 되뇌다보니 어느새 나의 신념처럼 돼버렸어요. 「닭이 울지 못하게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이지요』이 인터뷰 기사는 「시원한 눈매와 자그마한 체구의 손씨는 말투조차 나지막하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말뜻은 자그마하지가 않다」고 끝맺고 있다.
손 여사에게는 그때 정치활동을 다시 시작하는 남편 앞에 또 얼마나 험난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해금의 기쁨보다는 그것이 더 큰 근심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김 대통령도 손여사도 설마 그들의 「새벽」이 새벽과 개혁을 상징하는 닭의 해에 실현될줄은 예기치 못했을 것이다.
정몽주를 격살하고 수창궁에서 왕좌에 즉위한 이성계는 1393년(계유) 2월 계룡산에 올라 신도의 산수를 살피고 돌아온후 국호를 새아침이라는 뜻의 조선으로 정했다. 문민정부에 의해 강력한 개혁정치가 시작된 올해는 그로부터 꼭 6백년이 되는 10번째의 계유년이다. 이태조가 새 도읍으로 예정하고 터를 닦다가 그만둔 곳이 바로 지금 육군본부와 공군본부가 옮겨가 있는 계룡대다. 그곳에서 하필 닭의 해에 군부개혁이 추진되고 있는 일도 기묘하다면 기묘한 우연이다.
초여름 식탁에 입맛을 돋우는 숙주나물은 쉬기를 잘 하는 것이 흠이다. 그래서 그 나물 이름이 계유정난때 변절한 신숙주의 이름을 따 붙인 것으로 전해진다. 계유정난은 조선 개국후 60년이 되던 1453년(계유) 10월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정권을 탈취한 조선 최초의 유혈정변이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간)이 전하는 숙주나물의 유래는 일반에게 알려져 있는 얘기보다 훨씬 가혹하다. 이 사전의 「숙주나물」항은 「세조때 신숙주가 단종에게 충성을 맹세한 여섯신하를 고변하여 죽게 하자 백성들이 그를 미워하여 이 나물을 숙주라 하였다. 그것은 숙주나 물로 만두 소를 만들 때 짓이겨서 하기 때문에 신숙주를 이 나물 짓이기듯이 하라는 뜻에서이다」라고 설명해놓고 있다. 지도층의 부정과 불의를 증오하는 백성들의 마음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같다.
신숙주에게는 더 애절한 뒷얘기가 있다. 그가 훼절하고 대신이 되어 집에 돌아오자,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한 것을 알고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그의 부인 윤씨는 남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비난한후 다음날 아침 대들보에 목매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소설 만고의열 신숙주부인전(작자 연대 미상·세창서관간)의 줄거리다. 우리 사회의 교육받은 아내와 어머니들이 이 윤씨만한 마음가짐으로 남편을 연하고 자녀를 가르칠 수 있다면,그것은 개혁이 따로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의 훌륭한 시작이 될 것이다.
일상을 사는 서민들에게 자기혁신은 불안하고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문민정부의 개혁조치들이 「닭의 목 비틀기」로 끝나지 않고 서로 신뢰하는 자유시민사회의 「새벽」으로 승화하자면,시민의 도덕적 각성과 참여가 있어야 가능하다. 껍질을 벗는 괴로움을 이겨낸 자만이 세계의 자유시민임을 자부하는 명예를 함께 가질 수 있다.<편집국 부국장>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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