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혁 갈림속 “부침명암”/강택민 사태이후 당·정·군 장악/조자양 공직 박탈·이붕 유고상태/시위지도자 왕단 올해초 출감 북경 떠나4일은 천안문사태 4주년이 되는 날이다. 올해 기념일은 중국인 천안문사태의 배경이 되었던 것과 유사한 경기과열현상을 맞고 있고 또 그런대로 유지돼오던 보혁균형의 틀이 균열의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맞게돼 더욱 각별한 관심을 끌고 있다. 천안문사태 발발 4돌을 맞아 당시 주역들의 근황을 살펴본다.<편집자주>편집자주>
▲등소평(88)=천안문사태 당시의 직책인 당중앙군사위 주석직과 국가군사위 주석직을 각각 89년 11월과 90년 4월에 강택민총서기에 넘겨줘 현재는 아무런 공직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평당원인 그가 정책방향의 최종 결정권을 갖고 있는 최고결정권을 갖고 있는 최고실력자임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천안문사태 유혈진압을 통해 결과적으로 개혁에 제동을 걸었던 그는 92년 「남순강화」를 통해 개혁을 재점화,사태를 반전시켰다. 공직에서 모두 물러난후 공석상에 가끔 나타나고 있는 그는 지난 1월22일 설을 쇠러 상해에 들른 것이 TV에 보도된 이후 대중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 지난 1일 동경 증시에서는 7번째의 사망설이 나돌았으나 고령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건강은 양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자양(74)=쳔안문사태로 총서기직을 비롯한 모든 공직을 박탈당했다. 꾸준히 복권설이 나돌았으나 지난해 10월 14차 당대회(14대)를 앞으로 개최된 13기 9중전회에서 당을 분열시킨 과오를 범한 것으로 최종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올해 8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개정된 헌법전문에서 그가 주창해온 「사회주의 초급단계론」 개념이 삽입되었고 올초 사천성 성장에 새로 선출된 숙영이 조자양의 개혁에 대한 기여는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공공연히 찬양한 사실에서 보듯 「내면적」으로는 복권된듯한 인상마저 주고 있다.
그가 정식으로 복권되지 않는 이유는 등 사후를 겨냥,타협을 거부하고 지조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강택민(67)=천안문사태 당시 상해시 서기였다가 천안문사태 직후 긴급 소집된 당 13기 4중전회에서 일약 총서기로 선출됐다. 얼굴마담의 역에 머무를 것이라는 당시의 관측과는 달리 올해초 국가주석직마저 겸직,모택동이후 처음으로 당·정·군의 최고직위를 모두 차지했다.
천안문사태 당시 북경에 있지 않았을뿐 아니라 상해에서 벌어졌던 시위도 무난히 수습했기 때문에 유혈진압 책임과도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이붕(65)=천안문사태 당시의 총리로 조자양총서기와 반대되는 입장에 서서 계엄령 선포 등 유혈진압의 선봉역을 맡았다. 이선념,왕진 그리고 양어머니이기도 한 등영초 등 울타리역을 해주던 보수원로들이 지난해와 올해에 겹쳐 잇달아 사망하고 또 등소평의 「남순」이후 중국이 다시 개혁방향으로 돌아서면서 실각설,교체설이 끊이지 않았으나 지난 3월 전인대에서 5년 임기의 총리에 재선됐다. 그뒤 한달도 채 안된 지난 4월24일부터 돌연 「유고」상태로 들어갔다. 그의 유고는 4일로 41일째가 되는데 감기가 원인이라는 공식 설명과는 달리 경제정책을 둘러싼 「정치병」이라는 설이 심장발작과 같은 「중병설」과 함께 끈질기게 나돌고 있다.
▲반체제 인사들=천안문사태 당시 북경대학 역사학과 재학생으로 실질적인 지도자로 지목되었던 왕단(23)은 올해초 감옥에서 풀려나왔다. 그는 지난 1일 광서성으로 일주일 예정의 「여행」을 떠났다. 왕단이 출감이후 북경을 떠난 것은 이번이 세번째로 전인대 개막전에 당국의 배려로 남부지방을 여행했으며,부모를 만나기 위해 산동성을 여행했었다. 학생지도자 출신의 망명객중 해외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는 심단(25)이다. 그는 지난 8월초 몰래 귀국,대담무쌍하게도 9월1일 북경 한복판인 건국반점에서 「민주기금회 북경사무소」 개소식을 가지려다 당국에 체포돼 54일만에 미국으로 추방됐다. 그는 지난달 25일 유엔본부 앞에서 노상 기자회견을 가져 또한번 국제적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북경=유동희특파원>북경=유동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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