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중국땅에 묻혀있는 임시정부 요인 다섯분의 유해를 모셔오게 됐다. 이것은 광복 반세기를 코앞에 둔 48년만에야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나 이 다섯분들이 모두 1920년에서 25년대에 이르는 6년 사이에 세상을 뜬 만큼,우리는 70년동안 중국땅 상해에 외롭게 묻혀있던 민족의 선열을 모셔오는 것이다.3박4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29일 일본으로 떠난 중국의 전기침 외교부장은 이번 한국방문을 착실한 「실무여행」으로 끝냈다. 북한의 핵문제를 포함해서 대체로 균형잡힌 「실속」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경제협력이나 북한의 핵에다 댄다면 임시정부 요인 유해봉환은 상징적이고 의례적인 합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우리의 공식적인 요구를 받아들였다는데에는 우리 나름대로 감회가 크고,그 정치적 의의도 크다.
새삼 지적할 것도 없이 우리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헌법의 전문에서 선언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해를 이제야 모셔오게 된 것은 안으로 우리 자신에게 책임이 있고,또 중국정부의 애매모호한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중국은 과거에는 우리와 국교관계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그리고 국교수립후에는 북한의 눈치를 살피면서 임시정부 요인의 유해봉환에 응하지 않았었다.
이미 보도된 것처럼 오는 8·15 광복절 이전에 모셔올 작정인 다섯분은 정무원 총리급에 해당하는 지사들이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에서 굽힘없는 붓대로 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박은식선생은 이승만박사에 이은 2대 대통령으로,주석제로 헌법을 고쳐 김구에게 자리를 넘겨줬다. 신규식선생은 의정원 부의장에서부터 국무총리대리,노백린선생은 군무총장,김인전선생은 재정의 무거운 짐을 졌고 뒤에 중추원 의장,안태국선생은 이완용 자격사건,사내 총독 암살사건 조작 등으로 투옥됐다가 임시정부에 합류하기 위해 가다 병사했다.
이 다섯분을 우리 땅에 모심으로써 우리는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을 보다 자랑스럽게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35년동안의 일제강점기에도 이 나라의 법통은 결코 끊어지지 않았음을 재확인하게 된다. 1945년 이후의 국권회복은 이들 선열이 지켰던 법통을 이어받은 것일 뿐이다.
그런 뜻에서 요인 다섯분을 모시는 이 감격을 역사인식의 재정립을 위한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헌법 전문의 선언적 글귀가 아니라,정부가 앞장서 지도자들을 기리는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동시에 안중근의사나,가능하다면 윤동주시인의 유해도 모셔올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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