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개씨 소환되던 날/“46년 명예 붕괴” 침통/“내부에 칼날” 수사주역들 착잡/중수부 주변 적막속 발소리만1993년 5월27일은 국가 최고 사정기관인 검찰의 치욕의 날.검찰 간부들은 말이 없었다.
장래의 총장감으로 물망에 올랐던 이건개 전 대전고검장이 하오 3시35분께 서소문 대검청사에 나타나 사진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면서 검찰은 확실한 피사체가 됐다. 「권력의 시녀」라는 비난을 받아오기도 했지만 국가기강의 확립을 위해 진력하면서 46년간 쌓아올린 명예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검찰수뇌부는 이날 하루종일 무거운 표정으로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박종철총장은 상오 8시30분께 정상출근,9시께 8층 집무실에서 김태정 중수부장과 이종찬 중수부1과장으로부터 수사상황을 보고받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조사준비를 위해 이날새벽 2시를 넘겨 퇴근했던 박 총장에겐 새로운 하루가 아니라 전날의 괴로운 연장이었다.
이 전 고검장에게 돈을 준 정덕일씨(44)와 정씨로부터 받은 돈으로 구입한 서초동 20억원대의 빌라를 가등기해준 장진호 진로그룹회장(41) 등에 대한 철야조사 결과,이 전 고검장을 비롯한 3명의 전직 검찰간부 수사검사 배정,수사절차 등에 관한 보고가 이어졌다. 보고에는 평상시의 2배가까운 45분이 걸렸다.
이 총장이 이들을 내보내고 잠시 머리를 식힌뒤 김두희 법무장관과 통화를 할 무렵 9층 김 중수부장실에서는 홍준표검사와 이종찬 박주선 중부1,3과장 등이 대책을 숙의했다. 이 전 고검장의 혐의에 대한 적용법률과 수사절차 등을 최종검토한 이 회의자리에서는 연유를 잘 알수 없는 고성이 간간이 들렸다.
이윽고 침통한 표정의 홍 검사가 고개를 숙인채 15층 특별조사실로 올라갔다. 『슬롯머신 스캔들 수사이후 집에 못들어간지가 얼마나 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해온 홍 검사는 자신이 검찰의 치욕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것처럼 죄스러운 표정이었다.
10시25분께 김 중수부장은 또다시 총장실로 호출됐다.
『이 전 고검장외에 사법처리 대상자가 있습니까』 복도에서 마주친 기자들의 질문에 『아직 묻지 말아 주세요』라고 짧고 응답한 김 부장의 얼굴은 움푹 패어있었다.
박 총장은 김 부장으로부터 적용법조 등을 다시 보고받은 뒤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채 한동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김 중수부장은 20분후 이 중수1과장 등을 다시 불러 필요한 지시를 끝냈다. 그사이 송종의 서울지검장,김종구 법무부 검찰국장과도 통화했다. 이제 이 전 고검장을 조사하는 일만 남았다.
총장과 중수부장,중수부장과 1과장실로 연결됐던 인터폰도 작동을 멈췄다. 총장과 대검차장이 자리한 8층,중수부장을 비롯한 부장급 대검간부 사무실이 있는 9층에는 이따금씩 바쁜 발걸음만 들릴뿐 내내 정적이 감돌았다.
박 총장은 김도언차장과 함께,김 중수부장은 혼자 사무실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사무실밖에는 화창함을 넘어 잔인할 정도의 따가운 5월 햇볕이 속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검찰수뇌부가 식사를 마치고 이 전 고검장의 출두를 기다리는 시간은 길고도 고통스럽기 한이 없는 시간이었다.<정희경기자>정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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