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의 형질변경이 예고되고 있다. 정부의 경제력 집중완화와 업종전문화 정책에 완강하게 저항해온 재계가 이제 이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자세를 바꿔갈 기미를 보이고 있다. 청와대,경제기획원,재무부 등 정부의 관계 경제관료들은 국내 기업이 세계의 정상급 기업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재벌그룹들이 문어발식 경영을 지양하고 대신 일례를 들면 자동차같은 특정 전략업종에 집중투자,전문화함으로써 경쟁력을 증폭시켜야 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이에 따라 6공 때 이것을 정책에 반영했던 것이다. 30대 재벌그룹의 여신관리에 주력업체제를 도입,주력업체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여신제한을 면제해주기로 했다. 또한 공정거래법을 개정,계열기업간의 상호출자(순자산의 40%)와 상호보증한도(96년 3월까지 자본금의 2백%)를 대폭 축소한바 있다.재계는 6공의 이러한 정책 강행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부단히 시정을 요구해왔다. 그러던 것이 최근들어 일부 재벌그룹들이 전향의 뜻을 시사했었고 급기야는 현대그룹이 지난 22일 금강개발산업 등 8개 계열사의 분리·합병계획을 발표했다. 정상급 재벌그룹인 현대그룹의 이와같은 조처는 다른 재벌그룹들에 『같이 따라가는 것』 이외의 별다른 선택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을 것 같다. 현대그룹이 어떤 그룹보다도 계열기업들의 분리·합병에 선수를 치고 나온데 대해 그럴듯한 풀이들이 나왔다. 실질적인 그룹 총수인 정주영 명예회장이 2세(8명의 아들)들에게 사실상 지분정비를 해줘,계열사의 분리·독립에 큰 무리가 없게돼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정 명예회장의 대선 대결이 남긴 김 대통령과의 「불편한 관계」를 가능한한 빨리 해결해야 하는 것이 현대그룹이나 정 명예회장 개인적으로서도 시급한 현안과제다. 현대그룹서는 정부의 「신경제」 정책에 적극 협력하는 열의를 보이는 것이 일의 수순일 것이다. 따라서 계열사의 분리·독립을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유야 어떻든 현대그룹의 이번 결단은 재벌그룹의 재편성에 기폭제가 될 것만은 확실하다. 재벌그룹은 지금까지 경제의 압축성장을 이용하려 업종들을 게걸스럽게 신설 또는 흡수·통합하여 횡적 확대를 거듭,오늘날에는 대선단을 이루었다. 상위 10대 재벌그룹들의 계열사 수를 보면 지난 4월1일 현재 현대 45개,삼성 55개,대우 22개,럭키·금성 54개,선경 32개,한진 24개,쌍용 22개,기아 10개,한화 27개,롯데 32개 등으로 돼있다. 모든 것을 혼자 다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향,동업을 기피하는 성향,모방하는 성향 등 국민적 특성도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30대 재벌그룹치고 건설회사와 금융회사를 갖고 있지 않은 그룹이 없을 정도다. 이제는 재벌그룹들이 계열사 분리·독립을 어떠한 형태로 또한 어떠한 규모와 속도로 추진할 것인가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재벌그룹에 대한 업종전문화 유도정책은 단순히 재벌해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특정분야별로 세계정상에 도전할 수 있는 경쟁력을 키우자는데 있다.
정부로서는 여기에 걸맞는 산업정책을 수립,추진할 필요가 있다. 현대그룹은 계열사의 분리·독립·합병에 관한 2단계 계획도 추진할 것을 밝혔는데 계열사들을 개별적으로 분산,독립시킬지 아직 분명치 않다. 현대그룹이 재벌그룹의 재편성 형식·폭·속도에서도 향도의 역할을 할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정부는 재벌그룹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현실성있는 장기적인 산업정책을 갖고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관계부처가 내놓은 산업정책은 실행계획이 뒷받침되지 않는 도상계획에 불과했다. 확고한 재정·금융대책이 뒤따르지 않았다. 또한 관련된 기술개발정책은 그것대로 별개였다. 그나마도 산업정책은 장관이 경질될 때마다 바뀌었다. 결과는 산업정책의 부재였다. 재계의 재편성을 맞아 관·민의 긴밀한 협력체제가 다시 구축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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