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호/29연대 출동지원 통로 개척/김진선/수경사 동태 합수부 연락책/박종규/특전사 급습 정 사령관 체포「군사쿠데타 사건」인 12·12사태와 관련,군고위장성이 24일 전격 전역조치되면서 12·12 당시 이들의 역할에 대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번에 전역조치된 합참의장 이필섭대장(육사 16기)의 당시 보직은 9사단 29연대장으로 계급은 대령. 79년 12월12일밤 자정께 이 대령은 경복궁에 가있는 노태우사단장으로부터 연대병력을 이끌고 중앙청으로 출동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노 사단장의 지시는 사단참모장 구창회대령(육사 18기·전 3군 사령관)을 통해 전달됐다. 이 때는 정승화 계엄사령관겸 육군 참모총장이 서울 한남동 공관에서 총격전끝에 합수부측에 강제 연행된후 전군에 비상령이 내려진 가운데 합수부측과 육본측간에 일촉즉발의 대치상태가 벌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은 합수부측에 가담한 노태우소장이 9사단 병력을 동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 9사단의 각 연대장과 사단 참모장을 직접 전화로 불러내 자신의 육성명령없이는 절대로 병력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엄한 지시를 내려놓고 있었다. 29연대장 이필섭대령은 이건영사령관으로부터 이같은 지시를 받았으나 육본군사령관을 통해 내려오는 정식 명령보다는 직속상관인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연대 병령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했던 것. 29연대 병력은 인근 제2 기갑여단 1개 전차대대를 앞세우고 구파발의 수경사 검문소를 통과,13일 새벽 3시30분께 중앙청앞에 도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9사단의 중앙청 진주는 1공수여단(여단장 박희도준장)의 국방부 및 육본 점령과 함께 합수부측이 육본의 저항의지를 꺾고 군권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필섭 합참의장과 함께 전역조치된 2군 사령관 안병호중장은 12·12사태 당시 9사단 작전참모로 계급은 중령. 12·12사태 당일밤 안 중령은 29연대의 출동을 위한 사전조치 및 서울까지 진격할 때 통로개척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안 중령은 특히 29연대의 1개 대대가 한강 하류의 경계임무에 투입돼 출동이 어렵자 인근 30연대에서 1개 대대를 29연대로 배속시켜 출동토록하는 과정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한강 경비에 투입된 29연대의 1개 대대 대신 서울로 출동한 대대는 30연대의 1대대였으며 대대장은 유모중령(육사 22기·현 육군 소장). 안 중령과 유 중령은 같은 하나회 회원이어서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김진선 2군 사령관은 12·12사태 당시 중령으로 수경사 작전장교겸 상황실장을 맡고 있으면서 이날밤 합수본부쪽에 육본 지휘부가 옮겨와 있던 수경사령부의 움직임과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동태를 합수부쪽에 알려줌으로써 합수부측이 대세를 장악하는데 큰 기여를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김 중령은 특히 수경사 예하부대나 서울 각 검문소에서 올라오는 상황보고내용을 사령관에게 정확히 보고하지 않았을뿐 아니라 사령관의 지시를 예하부대에 전달하는 과정에서 늑장을 부려 합수부측을 진압하려는 장태원 수경사령관의 노력을 고의적으로 방해한 것으로 전해진다.
처음부터 하나회 회원이었던 이필섭·안병호씨와 달리 김진선씨는 12·12 때의 공헌으로 나중에 하나회가 가입했다고 한다.
이들 3인은 5·6공시절 군의 핵심요직을 거쳤으며 특히 6공들어서는 9·9 인맥의 핵심을 형성했다.
이번에 함께 전역조치된 56사단장 박종규소장(육사 23기)은 당시 3공수여단의 15대대장(중령). 그는 최세창여단장의 지시를 받고 부하 10여명과 함께 특전사령부를 급습,합수부측에 저항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던 정병주사령관을 체포했다. 이 과정서 정 사령관이 중상을 입었고 정 사령관의 비서실장 김오랑소령(육사 25기)이 총에 맞아 숨졌다.<이계성기자>이계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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