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무상 실감한 「6공 황태자」/10·26후 부상… 전·노정권 실세/「합당」으로 「YS벽」 뒤안길로박철언의원은 20일 하오 국회 본회의가 끝난뒤 기자들에 둘러싸여 의사당을 나서면서 『권력은 강하고 긴 것 같지만 사실 짧고도 약한 것』이라고 말했다.
6공의 「황태자」 등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전성기의 당당함을 찾아볼 수 없는 처연한 모습이었다.
그는 이어 『선산에 있는 아버님 묘소에 성묘라도 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만한 권력자에서 자연인 박철언으로 돌아간 표정이었다.
그는 21일 하오 검찰에 자진출두할 예정이어서 어쩌면 이날은 그의 의정생활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이 때문인지 박 의원과 악수를 하는 많은 의원들은 새삼 무력무상을 되씹는 표정들이었다.
일각에서는 자업자득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그의 부심은 변화무쌍한 정치판의 지난날을 회상시켜주고 있다.
경북고·서울대 법대 출신의 「TK엘리트」로 서울지검 검사였던 박 의원은 79년 10·26 직후 전두환 전 대통령에 의해 합수부에 차출되면서 엄청난 속도로 출세가도를 질주하기 시작한다.
국보위 법사위원,청와대 정무·법률 비서관,안기부 특보 등을 거치면서 그는 어느새 「5공실세」중의 한사람으로 자리잡았다.
여기에는 거시적이고도 치밀한 기획력 등 그의 「능력」과 아울러 그가 노태우 전 대통령 부인 김옥숙여사의 고종사촌 동생이라는 혈연적 요소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박 의원은 85년부터 안기부장 특보로 있으면서 민정당 대표로 있던 노씨에게 고급정보를 제공하는 등 일찍이 노 대통령 만들기에 주력했다.
특히 87년 노 전 대통령의 사조직인 월계수회를 맡아 대선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함으로써 수직상승을 위한 「날개」를 달게된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후 당시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청와대에 정책보좌관직을 신설,박 의원을 임명하고 이후 전국구 의원을 겸임시키는 파격적 조치를 취하는 등 가히 절대적 신임을 보여주었다.
그는 13대 총선 공천과정에 깊숙이 관여,「5공 거물」이던 권익현·권정달 전 의원을 탈락시킨 장본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극비 방북설」 「중소 밀행설」 등 북방외교와 관련해 숱한 화제를 몰고 다닌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때문에 6공 초기 그의 주변에는 사람과 정보가 늘 한꺼번에 몰렸다.
89년 정무장관 시절 그의 청사 집무실에는 손님이 비는 시간이 없었고 심지어 청사 주위에는 『총리방에는 안가도 그의 방에는 꼭 들러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또 박 의원의 개인사무실과 저택에 안기부 검찰 경찰 보안사 등 권력기관과의 비선 전화라인이 개설돼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내부견제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의 핵심측근인 안무혁 안기부장과 이춘구 내무장관이 대통령 친인척인 박 의원의 「독주」를 비판하다가 곧바로 경질했다. 그는 「새정치」와 「개혁」을 부르짖었다. 실제로 여소야대 시절 「뜨거운 감자」였던 5공 청산작업에 그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때문에 그만큼 많은 적을 만든 것도 사실이다.
5공 청산 와중에 의원직을 사퇴한 정호용의원이 그랬고 오랫동안 권력의 중심부에 서있던 이른바 「구 TK」들과도 불편한 관계였다.
그러나 박 의원은 90년 3당 합당을 통한 YS와의 「운명적」 만남을 기점으로 급속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사사건건 YS와 맞섰다. YS는 그에게 「청산돼야할 구 시대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YS는 그가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자 한계였다.
『내가 입을 열면 YS의 정치생명은 끝난다』는 폭탄발언에서 비롯된 이른바 박 의원의 「하극상」 파동,내각제 각서파동 등 권력투쟁에서 그는 참담한 패배를 맛보았다. 그 결과로 정무장관직을 물러났고 월계수회에서도 손을 뗄 수 밖에 없었다. 자연히 그의 계보도 와해돼 갔다.
92년 5월 대통령후보와 당권이 YS에게로 돌아가자 그는 민자당을 탈당했다.
야당 의원으로 변신하는 길만이 대선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판단한듯 했다.
민자당에서는 과거 계보의원중 아무도 그를 따라나가지 않았다. 그는 혈혈단신으로 국민당을 찾아갔으나 국민당과 함께 난파선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는 지난 대선 때부터 새정부 사법처리 대상 1호로 지목돼왔고 개혁과 사정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사건 때마다 빠지지 않고 이름이 거론되었다.
박 의원은 얼마전까지만해도 『내가 나쁜짓을 했으면 어떻게 지금까지 무사할 수 있었겠느냐』고 주장했지만 슬롯머신 스캔들에 이르러서는 빠져나가지 못했다.<유성식기자>유성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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