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서 「역사」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요즈음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는 현상이다. 김영삼대통령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훗날의 역사에 맡기자』고 한 뒤를 이어,16일에는 김종필 민자당 대표가 또 「역사」를 말했다.김종필대표는 이날 『5·16은 우리 민족사에서 엄연한 역사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얼핏 보기에 김 대표의 이날 발언은 「군사통치 32년」을 청산하려는 대세를 의식해서 조심스럽게 짜여진 것으로 보인다.
김 대표는 5·16을 다만 「존재한다」는 역사적 사실임을 강조하는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가 5·16의 맥을 이었다고 평가한 전두환정권과 노태우정권에 『잘나왔든 못나왔든』이라는 조심스런 전제조건을 달고 있는데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대표가 5·16을 영광된 역사의 자리에 굳히려는 생각이 있음은 확실하다. 그는 「기승전결론」을 들어 5·16 쿠데타와 박정희대통령이 역사를 일으켰다고 규정했다. 그의 기승전결론에 의하면 김영삼대통령의 「개혁정치」도 5·16과 박정희대통령이 일으킨 역사의 한 줄기일 뿐이다. 김 대표가 말하고 싶은 대목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자유와 평화 그리고 여유있는 삶」의 뿌리를 박정희대통령에게 연결짓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김 대표의 5·16 쿠데타에 대한 적극적 평가가 결국 「자유·평화」라는 안보론과 「여유있는 삶」이라고 「고도성장론」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된다.
30년동안 군사정권의 구호가 국가 안보론이었음을 우리는 신물이 날만큼 체험해왔다. 또 고도성장이 역대 군사정권 최대의 존재이유였는데도 우리는 지금 그들이 남겨놓은 구조적 침체에서 허덕이고 있다.
우리는 군사정권시대의 안보론과 고도성장론에 대해선 새삼 논의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게다가 다만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 해묵은 정치적 구호로 군사쿠데타를 미화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5·16 쿠데타에 주역으로 참여했던 김 대표의 발언에서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대세에 저항하려는 몸짓을 보는 것 같아 서글픔마저 느낀다. 비록 「쿠데타적 사건」이라는 소극적 표현을 썼지만,5공화국의 출발점이었던 12·12는 쿠데타로 공식 규정됐다. 그 뿌리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이 나라의 문민지배 전통과 헌법과 국민적 여망을 총칼로 짓밟은 5·16 쿠데타에 있다.
김영삼대통령 정부가 군사통치 32년을 청산할 생각이라면,당연히 5·16 쿠데타의 밑뿌리까지 비판·청산해야 할 것이다. 김종필대표의 5·16 미화발언은 쿠데타정권을 역사적으로 청산해야 된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줬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