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김영삼대통령은 문화체육부의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기업이 그동안 정치자금 등으로 썼던 돈을 문화부문에 쓰는 것은 훌륭한 사례가 될 것이다. 문화예술에 대한 기업의 투자와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문화계가 적극 설득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지금까지 우리나라 기업들의 정치헌금은 경제단체를 통해 비지정 기탁하거나 후원회에 가입해서 지정 기탁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보다는 그외에 비공식적으로 내는 것이 훨씬 큰부담이었다. 작년초 그당시 국민당 대표였던 정주영씨가 『3공때부터 6공까지 1년에 두차례씩 한번에 30억원내지 1백억원을 정치자금으로 냈다』고 밝힌적이 있다. 재계의 추산으로는 우리나라 기업중 10대그룹은 1년에 20억원내지 10억원이 정치자금으로 나가는 것으로 보고 있었고 이밖에 개별적으로 헌납되는 것이 건에 따라 많을 때는 수백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러나 이런 돈은 숨어서 다니는 것이므로 기업이 정치자금으로 투입한 액수의 정확한 규모는 집계할 길이 없다.
정치자금외에 각기업을 괴롭혀온 것에는 준조세라는 것이 있다. 이중에 각종 성금·찬조금 등 명목의 기부금으로 국내 법인 기업이 지출한 액수가 1991년의 통계로 한해에 9천9백23억원이었다. 이 기부금에는 여러 사회단체에 대한 지원말고도 경찰서,소방서,일선행정기관 등에 「상납」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액수만 따로 떼어낸다 해도 수천억원일 것이다.
김영삼대통령은 한푼의 정치자금도 안받겠다고 했으니 지금까지의 모든 음성적 정치헌금은 총액이 고스란히 기업의 손에 남게 된다. 그리고 상납이란 이름으로 내밀던 손들이 다 들어갔을테니 이 돈도 고인다. 하루 아침에 쌓인 이 많은 돈을 기업들은 어대에 쓸것인가. 궁금하던 차에 대통령이 묘안을 내놓았다. 이 거금이 문화자금으로 돌려진다면 얼마나 생색날까.
우리나라 문화예술에 대한 정부차원의 지원을 총괄하고 있는 문예진흥원의 올해 총예산이 3백90억원이고 그 가운데 순수진흥사업비는 2백28억원이다. 정치자금의 한뭉치 돈에 불과하다. 또 진흥원이 작년말을 목표연도로 하여 힘껏 모아온 문예진흥기금은 현재 목표액인 3천억원의 절반밖에 안되는 1천4백78억원이어서 목표연도를 1995년까지 연장해 놓고 있다. 정부의 문화체육부 금년도예산을 보면 체육청소년부와 통합하기 전에 문화부만으로 책정된 것이 1천5백54억원이다. 정치자금은 문화부 하나를 통째 운영하고도 넉넉히 남는다. 정치자금의 크기를 알만하고 문화자금의 왜소를 알만하다.
CI(Corprate Identity)라 하여 각 기업이 자기 주체성내지 차별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미국에서 였다. 기업에 대한 이미지와 신뢰감을 놓이기 위해 이 CI를 확립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것은 문화라는 자각이 생겨 이른바 「메세나」라고 부르는 문화지원운동이 80년대 들어 각국에서 활발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근년들어 각기업의 문화에 대한 기여가 찰츰 늘고는 있다.
외국에 있어서 기업의 문화지원 규모는 메세나의 선진국으로 인정받는 일본의 경우 각 기업의 문화지출 총액이 연간 8백억엔(약5천6백억원)이다. 이중에는 기업 자체내의 문화행사비용과 체육에 대한 지원금까지 포함되어 있어 정확히 따로 가려내기는 어려우나 문화헌금의 크기를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는 문화지원금만 작년 한해동안 총 10억프랑(약1천4백50억원)으로 1천여개의 기업이 내놓은 것이었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란 책으로도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미국의 다니엘 벨교수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정치,경제,문화의 불안정한 결합에 있다고 진단한다. 인간사회의 구성요소인 이 3자는 본시 삼위일체였다. 이것이 서로 조화를 잃음으로써 현대 사회의 파탄이 오고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특히 경제발전에 문화발전이 뒤따르지 못하고 있는 「문화적 지체현상」이 우리 사회의 여러가지 모순을 낳아 왔다. 지금 개혁의 거센 바람이 쓸고 있는 모든 병폐는 바로 이 경제와 문화의 거리에서 생긴 것이다. 이 거리를 좁혀 나란히 동행해야 한다. 경제와 문화의 화해다. 문화를 살릴 책임이 경제에 있다. 부정한 정치자금은 우리사회 전체를 부정하게 만든 원천이었다. 썩은 돈들은 이 돈에서 흘러나왔다. 기업은 이 원죄를 속죄함으로써 개혁대열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된다. 깨끗한 돈으로 사회를 깨끗이 씻는 것이다. 개혁으로 남는 정치자금을 문화자금으로 돌려 문화한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라를 정화하는 길이요 곧 경제 자체를 건강하게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정경유착」이라고들 했다. 이 말이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간다. 「문경유착」의 새로운 시대가 오고있다. 정경유착은 경제가 정치로부터 특혜를 바란 야합이었다. 문경유착으로 경제는 문화로부터 특혜를 받을 것이다. 받을수록 좋은 것이 문화적 특혜다. 정치는 배반할는지 모르지만 문화는 배반하지 않는다. 문화는 경제에 반드시 보상할 것이다. 정치자금을 주던 더러운 손을 씻고 새손으로 문화자금을 내밀면 그 손에 향기가 묻어올 것이다.<본사상임고문·논설의원>본사상임고문·논설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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