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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게스의 반지」/김창렬칼럼(토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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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게스의 반지」/김창렬칼럼(토요세평)

입력
1993.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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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게스는 소아시아 리디아의 왕이다. 그리스 신화의 이름난 영웅은 아니지만,플라톤의 「국가」와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모두 그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처음 왕을 섬기는 양치기였던 그는 우연히 반지 하나를 얻는다. 보석을 왼쪽으로 틀면 반지 낀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는 마술반지다. 기게스는 반지의 신통력을 힘입어 왕비를 범하고,왕비와 공모하여 왕을 죽인뒤 왕좌를 차지한다.

독일 근대연극의 선구자 프리드리히 헵벨(1813∼1863년)의 대표자 「기게스와 그의 반지」는,플라톤과 헤르도토스가 적어 놓은 기게스의 전설을 소재로 하고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리디아의 왕 칸다우레스는 왕비 로드페의 아름다움이 자랑이다. 그래서 그는 기게스로 하여금 마술반지의 힘을 빌려 왕비의 침실을 엿보게 한다. 이를 안 로드페는 기게스를 죽이려 한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왕은 기게스와의 결투끝에 죽는다. 왕비도 결국 따라 죽는다.

굳이 말을 하자면,이 줄거리의 주제는 감상물로서의 여성과 인격체로서의 여성이다. 그래서 「기게스와 그의 반지」는 양성문제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꼽히기도 한다. 같은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헨리크 입센(1828∼1906년)의 「인형의 집」은 「기게스의 반지」보다 24년이 늦다.

그러나 이 글의 관심은 그리스 신화의 족보나,근대연극의 계보가 아니다. 「기게스의 반지」는 아주 단순한,연상의 결과일 뿐이다.

금주들어 한국일보는 「검은 돈의 비밀통로­가명계좌」라는 대형 캠페인 시리즈를 시작했다. 그 첫회(5월12일자 1면)는 우리나라 여러금융기관이 안고 있는 가명계좌가 자그마치 1백5만개,여기 숨어있는 금융자산이 33조원에 이르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엄청난 규모에 놀란뒤 끝의 연상이 바로 「기게스의 반지」다. 이 가명계좌야말로 현대판 「기게스의 반지」 아닌가. 1백5만개나 되는 「기게스의 반지」를 그냥 두고야 「왕비의 침실」인들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새정부의 개혁바람이 아무리 거세다고 해도,정부 스스로 금융실명제를 미적거리는 한,그 바람은 바람으로 그치는 것 아닐까.

이 연상은 결코 비약이 아니다. 근래의 사정수사는 하나처럼 자금추적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가명계좌에서 가명계좌로 떠돌아 다니는 「검은 돈」의 세탁이 그 장벽이다. 요즘 검찰이 곤욕을 치르고 있는 슬롯머신 대부 정덕진의 배후세력 수사가 그 보기다. 3백개가 넘는다는 그의 가명계좌,그 사이 그를 비호했던 「검은 권력자」들에게는 「기게스의 반지」나 다름이 없다.

83년 레이건 대통령이 설치했던 「조직범죄에 대한 대통령위원회」는 3년간의 연구끝에 가장 효과적인 범죄와의 전쟁수단으로 「검은 돈」 줄기의 차단을 건의했다. 그 결과가 86년에 발효된 「돈세탁 규제법」. 미국은 본디 실명제가 정착되어 있지만,이 틈을 비집고 다니는 「검은 돈」의 세탁 자체를 범죄로 규정한 내용이다. 더하여 「은행비밀법」은 1만달러 이상의 현금거래의 보고의무를 은행에 지우고 있다. 위반하면,1년이하의 징역형을 받는다. 「검은 돈」을 차단하기 위한 이중 삼중의 올가미를 마련한 것이다. 어느 틈에도 「기게스의 반지」는 없다

지난달 국내에도 큰 파문을 던진 노소영·최태원 부부의 20만달러 사건은,이 올가미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어 빚어진 것이다. 그들이 한 짓은,「검은 돈」을 1만달러 이하로 분산 예금시키는 돈세탁의 초보적인 수법과 똑같다. 모르긴 몰라도,미국 검찰은 처음 부부를 범죄조직의 끄나풀로 보고 오랫동안 감시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제 부부는 귀국하는대로 우리나라 외화관리법 위반혐의를 조사받게 된다. 검찰은 담당 검사까지 지명해놓고 기다리고 있다. 문제의 20만달러를 스위스은행을 거쳐 밀반출했다는 것이 혐의의 요점이다.

그러나 검찰 수사가 그 혐의를 제대로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들에게는 국내의 가명계좌와 스위스의 비밀계좌라는 「기게스의 반지」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돈세탁과 그 규제제도를 조사한 함승희 검찰 연구관은 작년에 이미 「검은 돈」을 차단할 방도를 세우도록 건의하고 있다. 미국에서처럼 은행으로 하여금 「검은 돈」의 흐름을 보고케 하며,돈세탁 자체를 범죄로 규정하는 것이 그 방안중의 일부다.

물론 그의 건의는 금융실명제 실시에 대비하는 뜻을 담은 것이지만,근래 사정활동이 드러낸 바는 이 보다 더 다급하다. 그 몇달 사이 경험이 너무나 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명계좌 탓에 사정이 지척거린다는 것이다. 실명제를 그냥 두고는 어떤 개혁도 뿌리 내릴 수가 없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할 일 또한 너무나 뻔하다. 그것은 정부의 개혁의지를 의심받기전에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미적거리는 금융실명제의 향방을 보자니,「YS는 못말려」의 결단이,정말 아쉽다.<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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