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검은 돈」의 규모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주인인지,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전주와 출처 및 향방 등 일체를 베일속에 숨겨두려는 「검은 돈」이 국민경제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그 가공할 잠재적 파괴력에 두려움을 느낀다.어느 나라건 「검은 돈」이 나돌아 다니게 마련이다. 지하경제에는 반드시 「검은 돈」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치면 그 경제는 세계의 경쟁대열에서 탈락하는 수 밖에 없다.
한국일보의 최근 특립시리즈 「가명계좌검은 돈의 비밀통로」는 「검은 돈」의 생태와 문제점을 체계적으로 조명하는 기획인데,우리 경제의 실질적인 가명 거래규모를 32조9천6백억원으로 추산하고 있어 놀랍다.
내역을 보면 우선 가명계좌의 경우 92년말 현재 전은행 가명계좌 총 1백만9천개에 잔액 1조2천65억원(실명화율 98.5%)이다.
또한 증권사의 가명계좌는 지난 3월말 현재 좌수 2만5천9백55개로 전체의 1.2%,금액은 1조1천5백12억원으로 전체의 3.23%다. 단자,투신사에도 가명계좌가 있으나 크지 않다. 이들 가명계좌를 모두 합하면 1백5만계좌에 2조5천6백억원에 달한다.
여론의 화살은 덜 받지만 차명계좌는 가명계좌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 통상 모든계좌의 10% 선으로 추정되는데 이렇게 보면 차명계좌는 27조원 규모로 어림된다. 가명계좌의 약 10배로 추정된다. 또한 CD의 경우는 약 20%가 가명이므로 그 규모는 2조8천억원,가명계좌를 약간 상회하는 선이다.
여기에 국민주택 채권 등 무기명 장기채 6천억원을 추가할 수 있는 것이다. 가명·차명 등 제얼굴이 아닌 돈을 모두 합하면 물경 33조원 규모가 되는데 총통화의 약 3분의 1에 상당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금융실명제 실시의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이를 연기시켜온 역대 정권들은 「실명률 98%선」이라고 하여 「검은 돈」의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은 것 같은 인상을 주려고 해왔다.
그러나 「검은 돈」의 실제 총체규모는 이처럼 엄청난 것이다. 이 규모의 방대함 때문에 금융실명제 실시에 대해서는 실시여부 그 자체뿐만 아니라 실시시기와 방법을 둘러싸고 찬반의 대립이 있어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김영삼대통령의 새정부는 일단 「실시한다」는 것만은 기회있을 때마다 재천명해왔다. 따라서 실시 그 자체에 대해서는 지금은 국민들 사이에 별로 의구심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실시시기와 방법에 대해 정부당국은 계속 침묵하고 있다. 실시시기에 대해서 조기론과 비조기론이 엇갈리고 방법에 대해서 일시 전면 실시론과 점진적인 단계적 실시론이 대립되고 있다. 민간관계기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통일돼있지 않다. 재계를 대표하는 전경련,상의 등에서도 3단계 실시 등 단계적 실시론을 주장하고 있다. 시기도 사전준비를 강조,조기보다는 비조기를 선호하는 인상을 주는 것 같다. 그러나 경실련 등은 조기실시를 주장하고 있고 감사원장의 자문기구인 부정방지대책위는 단계적인 조기실시를 주장했다.
새정부는 나라와 경제운영의 틀을 다시 짜고 있는 만큼 개혁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현시점을 이용,조기실시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다. 방법은 충격이 크다고 생각하면 단계적인 접근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