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황·문제점/은행도 대고객대접 출처질문 삼가/돈주인 현찰 선호… 자금추적 어려워/억대이자도 싫다/이름밝히기 꺼려슬롯머신사건,동화은행사건 등 대형비리사건이 터질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게 가명계좌다. 상납 커미션 뇌물 등 검은 돈을 주고 받을 때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비밀통로가 바로 가명계좌다.
가명계좌는 얼굴이 없다. 조사를 해보지 않으면 누가 주인인지 알 수 없게 돼있다. 군인사비리사건,대입부정사건,하도급비리 등등 최근 잇달아 터진 대형사건을 통해 드러난 얼굴들은 공직자,정치인,대기업 관계자,금융인,폭력집단…. 실로 다양한 얼굴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사건이 생겨 외부에 노출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은행창구 직원들은 의사 변호사 세무사 연예인 사채업자는 물론이고 심지어 일선교사들,직장인,가정주부들까지 가명계좌를 일상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92년말 현재 전금융기관의 가명계좌수는 1백5만개에 달하고 있다. 떳떳지 못한 돈을 주거나 받을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한번쯤 가명계좌를 써 보았을 법한 수치이다.
가명계좌를 비롯한 금융의 가명거래는 누가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일까. 신정부 출범이후 사회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는 개혁작업에 맞추어 온갖 비리와 부조리 발생의 핵심 연결고리가 되고 있는 금융의 가명거래를 없애자는 취지아래 가명계좌의 현황과 생리 및 문제점을 시리즈로 엮어본다.<편집자주>편집자주>
공직자 재산공개 파동으로 떠들썩하던 지난 3월말 모외국은행 강남지역 지점에서는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월말 자금결제가 몰린데다 은행업무 마감시간(4시30분)이 임박,한창 바쁠 때인 하오 4시께 지점장실로 전화 한통이 왔다.
계좌번호를 불러주고 30분후에 갈테니 전액 1만원짜리 현찰로 준비해달라는 것이었다. 총액이 얼마냐고 묻자 2억이란 대답에 30분만에는 도저히 현찰을 마련할 수 없으니 일부는 수표도 괜찮으냐고 물었지만 대답은 『안된다』였다. 지점장이 단말기를 두들겨 확인해보니 가명으로 개설한 보통예금으로 입금된지 한달도 채 안된 계좌였다. 부랴부랴 결제자금으로 들어온 돈 1억여원과 본부의 긴급지원을 받은 현찰로 2억원을 마련했다.
전주는 예정된 시간에 큼직한 여행가방을 들고 나타나 현찰더미를 챙겨놓고 사라졌다. 지점장은 직업이 뭔지 왜 현찰로 찾아가는지 묻고 싶은게 많았지만 아무말도 건네지 못했다. 은행으로선 대고객인 가명거래자에 대해서는 상냥히 인사만 해야지 어떤 질문도 해서는 안된다는게 은행원들의 불문율이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모 시중은행 본점 영업부의 A차장은 더 기막힌 일을 겪었다. 점퍼를 걸친 허름한 차림의 중년남자가 나타나 만기도래한 1백억원어치의 CD(양도성예금증서)를 돈으로 찾아가면서 가명(무기명)으로 처리할 것을 요구했다. 지난해 10월 발행된 1백80일 만기의 이 CD는 당시 표면금리가 연 13%이므로 이자총액은 6억5천만원(1년 만기 표면금리에 따른 이자 13억원의 절반)이다.
이를 실명으로 찾으면 세금은 소득세율 21.5%에 따른 1억3천9백만원이나 가명으로 찾으면 64.5%의 고율이 적용돼 세액은 4억1천9백만원에 달하게 된다. 그 차액은 2억8천만원. 웬만한 서민이면 평생 모아야할 집한채 값을 대수롭지 않게 포기하고 가명처리를 요구하는데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A차장도 은행원의 철칙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들 두은행 일선 실무자들은 그 돈의 주인이 공직자나 정치인,아니면 재벌 관계자려니 추측했었다고 한다.
가명거래를 하는 사람들은 수억원에 달하는 이자도 아쉬워하지 않는다. 이자 몇푼보다 얼굴 감추어 주기를 더 바란다. 그래서 가명계좌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액수가 몇억대이든 수백만원이든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대리인을 내세운다.
가명거래자들은 현찰을 좋아한다. 수표를 통한 자금추적을 피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가명통장은 1백만원 1억원 등으로 끝단위없이 금액이 딱 떨어지고 대개 정기적으로 입금되다가 일시에 출금되는 경우가 많다. 정기적으로 상납되는 돈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92년말 현재 전 금융기관의 가명계좌는 총 1백5만개의 잔액은 2조5천6백억원. 은행은 1백만9천계좌에 1조2천65억원이고 증권(3월말 현재)은 2만5천9백55개에 1조1천5백12억원이다.
여기에 금융관행상 일반화돼있는 차명계좌와 가명으로 거래할 수 있는 CD·장기채권을 합하면 가명거래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금융계는 대체로 전 계좌의 10% 내외를 차명으로 보고 있는데 이에 따른 차명규모는 은행이 9조원대,증권을 비롯한 2금융권이 18조원대로 총 27조원대다. CD는 발행잔액이 14조원으로 20% 정도인 2조8천억원 가량이 가명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6천억원에 달하는 국민주택 채권 등 장기채는 거의 전부가 무기명이 가능하다.
결국 가명계좌가 2조5천억원 정도,차명계좌가 27조원 정도,CD·채권 등의 가명거래가 3조4천억원 등으로 가명·차명계좌와 가명거래를 모두 합한 실질적 가명거래 규모는 32조9천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동아대 박영수교수 등 일부 학계에서 가장 보수적으로 추정하고 있는 지하경제규모 30조원(92년말 현재)과 유사한 수치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검은 돈들이 가명거래를 허용하고 있는 현행 법체계의 보호와 금융기관의 특별대접을 받아가면서 이 사회에서 활개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이백규기자>이백규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