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8 고집 공군 재검토 5개월만에 “변심”/신중했던 청와대 1회 보고로 F16 결정차세대 전투기사업(KFP)의 기종선정 변경에 과연 정치적 요인이 작용했을까.
KFP의 기종으로 FA18을 선정했던 89년 12월과 기종선정을 번복,F16으로 결정한 91년 3월까지 1년3개월사이 국방부와 공군의 KFP 관계자들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모두 교체돼 정치적 요인개입의 개연성을 강하게 시사해주고 있다.
KFP 의혹을 최근 처음으로 폭로한 정용후 공군 참모총장이 90년 9월 교체됐고,이상훈 국방부장관이 한달뒤인 90년 10월 경질됐으며,이종구 국방부장관이 취임한지 1개월만에 KFP 기종에 대한 재검토 발표가 나왔다. KFP 기종선정에 대한 재검토가 한창이던 91년 1월에는 국방부의 KFP사업 총괄부서인 전투기사업단장이 최동환 공군 소장에서 정성규 공군 준장으로 바뀌었다. 반면 KFP에 관여했던 청와대의 김종휘 외교안보수석과 김희상 국방비서관은 최초 기종선정 때부터 기종결정 번복때까지 줄곧 자리를 지켰다.
이를 두고 당시 F16을 지지했던 청와대측과 FA18을 고집했던 국방부·공군간의 줄다리기에서 청와대쪽이 최종 승리,반대의견의 인사들을 교체한 결과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89년 12월 FA18을 KFP 기종으로 선정한다고 발표한후 이상훈 국방부장관은 기자간담회에서 『공군의 사기가 올라갔다는 총장의 보고를 들었다.(F16을 선택함으로써) 주머니돈을 조금 아낀다고해도 가뜩이나 민항기 조종사로 나가겠다는 분위기인데 공군 조종사들이 선호하는 전투기를 선택해 마음이 놓인다』고 소감을 밝히고 『여러사람의 파워게임이 있었고 비교분석하느라 시간이 걸렸지만 사명감을 갖고 기종을 선정했다. 앞으로(기종선정 결과가) 문제되면 청문회 이상의 무서운 처벌도 감수하겠다』고 덧붙였다.
이날 이 장관의 발표시 배석했던 정용후 공참총장은 그러나 9개월뒤 「건강상 이유」(당시 정부발표)로 물러났고 이 장관도 1개월후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파문」으로 하차했다.
이 장관 퇴임후 5개월만에 KFP 기종은 F16으로 급선회했고 2년여만에 이 장관이 우려했던 「문제」가 표면화,정치적 의혹마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당시 KFP의 기종선정과 관련,청와대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선 청와대는 최초 기종선정시 매우 신중한 자세였고 특히 주관부서인 외교안보수석실은 FA18과 F16의 엄청난 가격차를 내세워 예산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분위기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공군에서는 정 총장 이전인 서동열총장 시절 이미 KFP 기종으로 FA18을 굳혔고 89년초 이상훈 국방부장관과 서 총장은 청와대 보고를 통해 처음으로 FA18의 재가를 노태우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보다 완벽한 검토와 판단」을 요구했고 그후 2차례에 걸친 공식 보고에서도 재가를 내리지 않았다.
마지막 보고에서 노 대통령은 ▲기종선정후 FA18의 가격인상이 없을 것임을 철저히 확인하고 ▲핵심기술 이전문제를 확실하게 보장받을 것을 다짐한뒤 FA18을 제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KFP의 기종선정 연구를 성능은 공군,운용성은 합참,경제성은 항공산업 육성회에서 나눠 검토하고 국방부에서 취합토록 했었다. 그러나 당시 경제성의 분석이 너무 결여됐다는 지적이 제기됐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청와대의 우려대로 MD측이 값을 대폭 올림으로써 대안은 F16뿐이었다는 주장이다.
이와관련,이종구 당시 국방부장관은 『FA18로 결정했을 경우 공군의 전력증강사업비 전부를 갖고도 모자라 육·해군의 사업비를 끌어다 써야 했을 것』이라며 『가격만 맞았다면 당연히 FA18을 택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기종변경은 가격요인 때문이었다는 이 장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해도 ▲그토록 FA18을 고집했던 공군의 의견이 어떻게 재검토 5개월만에 바뀌었고 ▲FA18 결정때는 그렇게 신중했던 청와대에서 F16으로의 번복때는 국방부장관의 1회 보고만으로 재가했는가하는 점이 여전히 의문점으로 남는다는 지적이다.<박정태기자>박정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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