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 해병대/“독립운영 바람직” 의견/73년후 흡수… 인사권등 관장/해군/“독자집단” 의식 영역확보 노력/해병대전 해군 참모총장 전 해병대 사령관의 구속을 불러온 해군과 해병대의 비리는 단순한 개인차원의 비리인가.
이번 사건의 경우 해군과 해병대의 위상관계라는 우리 군구조상의 미묘한 문제가 영향을 미친 측면이 있다.
「귀신잡는 해병」이란 말처럼 한국군의 용맹성을 대표하는 군조직으로 인식돼온 해명이 해군내의 한병과에 머물면서 응어리져온 구조적 문제가 개혁의 와중에서 터져나왔다는 시각이 그것이다.
87년 해벙출신 장교와 사병을 망라한 단체로 발족돼 70만 회원을 자랑하는 해병 전우회의 한 관계자는 「사병의 의견」임을 강조하며 조기엽 전 사령관 사건을 『돈을 주고 받았다는데 분노를 느끼지만 해병으로서의 공로를 생각할 때 동정이 간다』는 말로 이 미묘한 분위기를 표현했다.
스스로를 「제4군」이라 여기며 속된 표현으로 「물개(해군)」 「땅개(육군)」와 자신들을 구별하려는 해병은 해군내의 한 병과일뿐 자기 정체를 획득하지 못했다고 여기고 있다.
조 전 사령관은 이런 분위기에서 제19대 해병대 사령관으로 재직할 당시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박력있고 의리있는 지휘관」이라는 호평과 「지나치게 인사문제를 폐쇄적으로 운영,해군지휘부와 마찰을 빚었던 인물」이라는 혹평이 엇갈렸다. 관계자들은 바로 이 인사운영의 폐쇄성을 해병의 독자적 영역 확보노력이란 시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검찰수사에서 드러난 것은 결국 그가 해병의 해군에 대한 영향력 확대보다는 비리라는 늪에 빠져들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해병 관계자들중에는 조씨가 사령관직에 오른 것 자체를 『해병의 자부심을 팔아먹고 해군에 청탁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독자적으로 집단의식을 가진 해병과 자신들을 모집단이라고 생각하는 해군의 관계에서는 경계와 갈등요소가 상존한다. 조씨가 구속되기전 자신의 뇌물수수설을 부인하면서 『인사권이 없기 때문』이라고 강변한 것도 인사권을 둘러싼 갈등의 한 표현이다.
군관계자들은 그래서 정치적 상황에 의해 존폐 양상을 받아온 해병의 위상이 하루빨리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해병은 49년 4월15일 경남 진해서 3백80여평의 인원으로 창설됐다. 여순반란사건 등을 거치면서 육군만으로는 힘겨운 상륙전 등의 특수임무를 띠고 만들어졌지만 현대식 무기로는 M1 소총 한자루밖에 없었다는 일화도 있다.
창설 4개월후의 진주 공비토벌과 한국전쟁 초반 진동리전투 등에서 전과를 올린 해병대는 총영 상륙작전시 「귀신잡는 해병」의 별명을 얻었고 월남전에서도 차진동작전으로 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5·16쿠데타가 나고 그 선봉에 해병대가 나서면서 해병대는 정치적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된다.
73년 10월에는 국군조직법 개정으로 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되면서 지휘권 인사권 작전권과 군보급 업무 등이 해군으로 이양,해군의 한 전투병과로 흡수했다. 당시 해병대가 지나치게 강한 군세력으로 크는 것을 막기위한 견제조치라는 설이 나돌았다.
해병대 사령부는 그후 14년만인 87년 11월 해군 참모총장의 예하부대로 부활했다.
지난해초부터 해병을 육·해·공군과 같은 독립병과로 부활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해병대 외부에서는 인사권과 예산권이 해군 참모총장에게 있다지만 조씨 경우에서 보듯 사실상 독립적으로 운영돼 비리의 소지가 돼왔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병력수에는 해군이 3만여,해병이 2만5천여명으로 해군출신이 종적인 지휘권을 온전하게 행사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래서 해병대 관계자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해병대가 독립부대로서의 위상을 되찾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하종오기자>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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