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대통령은 공직자들의 재산공개를 감행함으로써 부정척결에 관한 그의 공약이 공약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부정의 뿌리는 돈에 있으니 만큼 고위공직자들의 재산이 국민 앞에 공개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국민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았고,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장관과 국회의원들이 여론의 압력에 밀려 공직을 사퇴하는 사례가 이루어졌다. 앞으로는 공직을 일할 자리보다 「먹을 자리」로 생각하고 저마다 탐내는 풍토가 차츰 사라지고,유능한 인재들이 개인적 희생을 무릅쓰고 공직에 봉사하게 되는 풍토가 조성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대통령에게 갈채를 보내는 국민의 간절한 바람이다.그러나 이번의 조처가 전에도 정권의 교체될 때마다 그랬듯이 「재수없는」 사람들만이 걸려드는 일회성 충격요법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정화효과를 가지기 위해서는 이제 그동안 공직자들의 재산공개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이며,얻어낸 긍정적 효과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뒤따라 할 조처는 어떠한 것인가를 냉정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정치계의 유명인사들의 재산내역이 세부적으로 공개되는 과정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통쾌하게 느꼈던 것은 정계가 부패했다는 의혹이 사실이었음이 입증되었고,망신당해야 할 사람들이 망신을 당했다는 점이었다. 쉬지 않고 뼈빠지게 일을 해도 집 한칸 자기 것으로 만들기가 어려운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고급공무원이나 국회의원들이 많은 재산을 축적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지 적어도 도덕적 차원에서는 부정에 연루되었다함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근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재산이 많다는 사실을 노출시키는 것 자체로써 부정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며 척결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특히 「참신한」 인물이라고 새로 공직에 발탁된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재산상태가 그들의 도덕적 자질에 대한 판단근거로 사용될 수 있는 근거는 더욱 희박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공권을 남용해서나 또는 다른 부당한 방법으로 사리를 채우고 축재를 했는가 하는 일이지 재산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번의 일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공무원 사회나 심지어는 일부 언론이 보여준 태도에 자못 경망스럽고 위선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예를들어 신문들은 정부 각 부처가 저마다 새로 임명된 자기네 장관이 재산소유 서열에서 그리 높지 않은 것을 알고 안도의 숨을 쉬거나,반대로 높은 것을 보고 조바심을 했다고 보도했다. 언제부터 우리나라에서 가난이 그 자체로서 미덕이었던가? 현재 서울에 웬만한 집 한채를 소유하고 있으면 그 평가액이 4,5억원이되고 일평생 행상으로 어렵게 돈을 모은 노인도 그것을 수십억으로 불려서 학교 재단에 기증했다는 미담같은 것이 심심치않게 나올 수 있는 것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경제를 발전시켜온 우리의 현실이다. 나라살림을 운영하도록 발탁받은 유능한 인재들이 자기 가족을 편안하게 살릴 정도의 재산도 못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과연 부정의 유혹을 물리치고 깨끗한 자세로 공직을 수행해 나아갈 능력이 있을까를 차라리 의심해볼 법도 하다.
다만 고위공직자들은 국민앞에 나서서 한점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이어야 된다는 점에서 그들은 재산내역을 등록하여 언제고 공적 필요성이 인정되면 누구나가 열람할 수 있게 하며 탈세나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재상증식 등 미심쩍은 점이 발견될 때에는 법의 추궁도 받을 각오를 하도록 함이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언론매체를 통해 재산의 세부적 내역이 천하에 공개되며 가족 몇대의 사생활까지 침해당하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개인의 재산상태를 놓고 도덕성 여부를 따지는 일보다도 공권을 남용한 부정축재가 이루어질 수 있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밝혀내서 그것들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나가며 애써 일해서 소득세를 꼬박 꼬박 내는 사람보다도 불로소득을 하는 사람이 더 잘 살 수 있게 허용하는 사회의 구조적 원인을 제거하는데 개혁의 초점을 맞추는 일이다.
가장 급한 일은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고,지금까지 단순히 여론의 지지에만 의존하여 「혁명적」 방식으로 추진되었던 부정척결의 효과를 영속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공직자윤리법을 수정보완하는 일이다. 대통령이고 사회 여론이고 초법적 차원에서 일을 추진하는 것이 오래 허용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윤리법은 사후조처일 뿐이고 부정과 부패를 뿌리 뽑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예방책이 절실히 요청된다. 우리 역사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관존민비 관념을 불식시키고 민주사회의 공직자는 관리가 아니라 공복이라는 인식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공무와 예산집행 내역을 최대한으로 공개함으로써 국민이 문자 그대로 주인역할을 하도록 격려하는 일이 필요하다.
항상 문제가 되어온 정치자금의 조달방식이 법적으로 현실화되어야 하며,납득할만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해상충 때문에 공정한 업무집행이 어렵다고 판단되는 상황,예를들어 고위공직자가 자기 산하에 있던 기관의 책임자로 퇴임후 발탁되어 간다든가,사제지간이나 선후배 관계 때문에 판사와 변호사로서의 엄정한 처신이 어려울 것이 환히 내다보이는 상황에서 재판이 진행되거나 하듯이 부정과 사리가 곁들일 수 있는 소지가 분명히 있는 경우 등이 지금까지처럼 방치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마땅히 허가하고 장려해 주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데 대해서도 허가해서는 안될 것을 해준데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벌칙이 가해진다면 공무원이 부패할 수 있는 소지는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새정부는 우리 사회의 고질인 공직사회의 부정을 척결하기 위해 높이 살만한 개혁의지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 개혁이 성공하고 못하고는 결국 국민 개개인이 얼마나 투철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그 일에 동참하며 감정이 아니라 이성의 힘으로 사태를 판단하고 행동하는가에 달려있다.
공직이 먹을 자리가 아니고 일할 자리라는 인식이 공직자들 자신에게 요청됨은 말할 것도 없지만,국민도 공직자들이 권력을 누리는 기쁨 못지않게 막중한 책임을 수행하는 어려움을 안고 사는 사람들임을 인정하고 문책을 엄중하게 하되 격려도 아끼지 않는 태도를 길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라살림을 운영하는 막중한 책임을 새로 맡은 사람들을 당혹스런 상황으로 몰아넣고 국민 대다수가 이상한 쾌감을 느끼도록까지 심각해진 계층간의 위화감과 불건전한 정신적 풍토를 개혁과 일에는 역시 권력이고 돈이고 지식이고 기술이고 힘이 무엇이든 남보다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앞장서야 됨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서울대 교수·서양사>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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