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속에 그들의 피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오,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이 사람의 가슴마다 되살아 피어나리다』. 서울 수유리의 4월 학생혁명기념탑비문은 독재에 항거하다 흉탄에 쓰러져간 4·19영령의 진혼이 미진함을 웅변하고 있다. ◆4·19 「의거」가 엊그제 일어난 것 같은데 벌써 33주기다. 돌이켜보면 한세대의 짧지않은 시간속에 우리는 너무나 많은 변화를 겪었다. 정치·경제·사회 등 어느 것 하나 4·19 당시에 정지해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정치는 너무나 멀리 우회했던 것 같다. 5·16 군사쿠데타,3공,5공,6공 등. 그동안 군사 및 준군사정부는 4·19 「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의식적으로 희석하려 했다. ◆4·19 데모는 학생이 주축이 됐고 시민들이 가세했던 글자 그대로 범시민적 「혁명」이다. 너와 내가 집권세력의 독재와 전횡에 항거했던 비폭력적인 혁명이었다. 조직된 세력이 없었기에 혁명의 전리품은 정치인들의 독차지가 됐고 이들도 결국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축출되는 운명을 겪게 됐다. 「4·19혁명」의 정신은 방황하게 됐다. 이래서 미완으로 남게됐다. ◆소위 4·19세대는 지금 50대 중반이 되어 정계·관계·학계·재계·언론계 등 사회 각층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 4·19 「혁명」은 지도자가 없는 밑으로부터의 「혁명」이었다. 지도자를 자처하는 자들에 의해 고귀한 희생들이 이용되기도 했다. 김치호(당시 서울 문리대) 안승준(서울 상대) 등 1백85명의 아까운 이름들은 모두 민주와 정의를 위한 제단에 피를 뿌린 젊음들이다. 김·안 두동문은 특히 누구보다 평범했던 우등생들로 기억속에 살아있다. ◆김영삼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4·19묘지를 참배했다. 그는 『4·19는… 문민정부의 출현으로 비로서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나아가게 됐다』고 말했다. 4·19는 역사적 위상이 아직 정립되지 않고 있다. 이제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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