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 설립등 「재계틀」 마련에 큰 공헌19일 1백3세로 타계한 해사 이원순옹은 한국 현대사 1백년의 「살아있는 사전」으로 불릴 정도의 뚜렷한 족적을 남긴 큰 인물이다.
갑신정변 6년후인 1890년 개화바람이 한창일때 서울 삼각동에서 한의원의 아들로 태어난 해사는 배재학당과 관립외국어학교 및 보성전문학교를 거쳐 24세의 나이로 하와이로 건너가 30여년동안 독립운동가로서 조국독립을 위해 활약했다. 하와이시절 이승만 등과 함께 대한독립단 대한인 동지회 등에서 활동했고 독립정부도 세워지지 않은 1947년에는 개인여권을 들고 당시의 조선체육회(KOC)를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정식회원으로 가입시키기도 했다.
1953년 하와이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해사는 삼성그룹의 고 이병철회장이 사무실을 내고있던 반도호텔에서 대한증권을 설립,기업인으로의 첫 활동에 들어갔다. 그는 하와이농장에서 막노동판을 돌며 많은 돈을 모아 한국 최초의 백만장자로도 불렸으나 개인적인 축재에는 관심이 없었고 61년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경련)와 63년 한미협의회를 설립하는 등 재계의 틀을 갖추는 데 주력했었다. 그가 운영했던 기업은 대한증권과 동생산업체인 한국해광주식회사뿐이다.
백수가 되던 89년부터 건강이 악화돼 병원에서 요양하면서도 전경련 고문,광복회 고문,로터리회원 등으로 사회활동을 쉬지않았었다. 조국의 통일과 올림픽 유치가 꿈이었던 그는 끝내 통일조국을 보지못하고 타계했으나 새로운 한국 기업인상을 정립한 「영원한 경제인」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인간 이승만」이란 저서를 남겼으며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이종재기자>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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