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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의 부활과 경의(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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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의 부활과 경의(사설)

입력
1993.04.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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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가 정부의 긍정적 평가와 공식적 경의를 받았다. 5·16 쿠데타이후 32년만의 일이다. 이날 김영삼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4·19묘역을 참배했다. 이로써 5·16 쿠데타이후 역대 군사정권들이 애써 역사의 그늘속에 파묻으려했던 4·19의 기억과 그 정신이 되살아난 것이다.군사정권 제1세대였던 박정희정권은 헌법 전문에 4·19와 함께 5·16을 끼워넣었다가,군사정권 제2세대인 5공 정권은 아예 4·19와 5·16을 빼 버렸었다. 그뒤 6공화국이 막을 올리면서 4·19가 다시 헌법 전문에 복귀했지만,역시 공식적인 경의의 대상에는 오르지 못했었다.

3·15 부정선거를 도화선으로 했던 4·19 저항운동의 진상에 관해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초보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원칙을 지키려는 국민적 저항운동이었다는데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우리 역사상 저항운동은 많았지만,자유·민주를 위한 국민의 저항권이 일단 정권교체를 달성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로부터 불과 1년1개월뒤 5·16 쿠데타로 4·19의 꿈은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던 것이다.

국민의 저항권이라는 맥락에서 4·19는 3·1운동과 뿌리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역대 군사정권들이 「개발독재」의 정당화와 함께 4·19를 역사의 그늘속에 암장하려 했던 것은 그들의 반민주적 토대를 잃지 않으려는 노력과 통하는 것이었다.

이제 32년만에 등장한 문민정부가 4·19의 복권을 선언한 것은 군사독재시대가 끝났음을 확인하는 통과의례와 같은 뜻을 지닌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4·19와 같은 역사적 맥락을 지닌 제2,제3의 4·19가 영예로운 복권을 기다리고 있음을 잊을 수 없다.

유신체제 붕괴에 이은 또 하나의 군사정권 출현에 저항했던 80년 광주항쟁과,5공화국의 몰락을 결정지웠던 87년의 6월 항쟁이 그 큰 초점이다. 이 기간동안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던졌었다. 우리는 아직도 이들이 과연 몇사람이나 되었던가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김영삼대통령의 4·19 묘역참배와 함께 우리는 5공화국 때 저항운동이 정당한 복권을 이룩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 출발점은 광주항쟁의 영예로운 복권이 될 것이다.

우리는 김영삼대통령의 4·19 묘역참배가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하나의 「통과의례」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도 광주항쟁과 6월 항쟁의 명예로운 자리매김이 급하다. 그것은 32년만의 문민정부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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