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땅엔 농민 개혁염원 아직도/한서린 희생자 넋… 이승서 숨쉬는듯/20여일 횃불밝힌 집회터엔 돌성만 외로이 남아동학혁명이 내년으로 1백주년을 맞는다. 동학은 혁명에서 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학계의 성격규명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우리 근대사의 분수령이 된 역사적 의미는 변할 수 없다. 동학조직을 근간으로 농민이 주체가 되어 사회개혁 보국안민을 추구한 의의는 한없이 큰 것이다. 더구나 올해는 동학혁명의 싹을 잉태한 보은 취회 1백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동학혁명 1백주년을 앞두고 동학의 불길이 타올랐던 역사의 현장을 더듬어 당시 농민의 외침속에 담겨있던 진실을 캐내는 시리즈를 내보낸다. 이 시리즈는 사계 전문가의 자문을 곁들여 동학의 올바른 자리매김 못지않게 역사의 교훈에 초점을 맞출 계획이다.
갑오 동학혁명(1894년)을 잉태한 보은땅,장내리로 향하는 발걸음은 그 의미는 다를지라도 한세기전 동학교도들 못지 않은 설렘을 담고 있었다. 보은읍내에서 상주로 가는 국도를 따라가다 통일휴게소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다보면 외속 면의 면소재지인 장내리가 나온다. 읍내에서 차편으로 부과 10여분 남짓 거리다. 주민들에게는 장안이라는 이름이 더 친근한 장내리 옥녀봉 기슭,보은 취회가 열렸던 역사의 현장이다.
설렘을 실은 발길이 그 자리에 멈췄지만 정작 마음이 한 세기를 되돌아 그들에게 다가가기는 쉽지 않았다. 지금 여기엔 수많은 교도도 없고,외침도 없고,열정도 없고,회한도 없다. 그렇지만 논 사이로 남아 있는 초라한 성터와 동학 교도들이 물을 길어다 먹던 북두문이 연못(소)과 성쌓을 돌을 날라온 삼가천을 돌아 보는 사이에,눈에 보이고 발에 닿는 모든것들,심지어는 거센 바람소리마저 그들의 체취를 전해주는 것 같아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1883년 3월(이하 음력) 보은 취회의 경통(동학교도간의 모임을 알리는 통문)을 받고 장내리로 걸음을 재촉하던 교도들의 가슴속엔 겨우내 잔뜩 움츠렸던 초목이 새생명의 기지개를 켜듯 희망의 싹이 움트고 있었을 것이다. 그 희망의 언저리에는 반상의 신분 차별과 관리의 수탈과 탄압에서 벗어나,동학의 가르침대로 모든 사람이 한울님처럼 존중되는 이상세계를 향한 기원이 자리하고 있었으리라.
우리 국토의 한 복판에 들어 앉은 보은은 예나 지금이나 경기와 호서와 영남을 잇는 길목이다. 조정의 압박을 피해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험준한 산세를 보호처로 삼아 포교활동에 나선 2세교조 최시형은 교통의 요지로 교세가 강한 충청 전라 경상도의 교도들을 쉽게 집결시킬 수 있는 보은을 집회장소로 결정했고 집결 지시가 내려지자 3월11일부터 매일 각처에서 교도들이 구름처럼 장내리로 몰려들었다. 당시 한사람당 한푼씩 성금을 거뒀는데 모두 2백30냥이 모였다는 기록으로 미뤄 취회가 절정에 달할 무렵에는 2만3천명을 넘어 최대 3만명 가까운 교도가 참여한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당시 선무사로 나선 호조판서 어윤중은 장계에서 『이 집회는 조그만한 무기도 휴대하지 않은 것이므로 다름아닌 민회와 같은 것이다. 일찍이 듣기에는 각국에서 역시 민회가 있어 정부의 정령이 국민과 국가에 불편함이 있으면 회의하여 강정한다하니 이 집회도 그와 같은 것이며 어찌 비류로 간주할 수 있겠는가』고 밝혔다. 질서와 규율 또한 엄하여 떡장수 엿장수가 오면 둘러 앉아 사먹기도 했는데 각기 자기몫을 어김없이 치러 팔린 분량만큼 계산이 딱딱 맞아떨어지기에 장사하는 사람들이 감탄하고 존경했다고 한다.
동학을 중심으로 백성들이 힘을 모아 국정의 문란과 외세침략에 대응하는 변혁운동의 의지를 다짐한 보은 취회는 20여일간 계속됐다. 그러나 이 역사적 보국안민과 사회개혁운동은 정부의 회유와 압력,그리고 지도부의 소극적 자세로 상징적인 성과만 안은채 해산되고 말았다. 같은 시기에 보은의 지도부보다 더 급진적인 성향의 교도 수천명이 전라도 금구 원평에서 집회를 갖고 호응을 했으나 이때 잉태된 개혁의 불씨에 불이 지펴지기에는 그로부터 일년의 세월이 흘러야했다.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여의 13자 주문이 메아리쳤던 옥녀봉 기슭의 묵정밭은 옥답으로 변해 있었다(시천주는 사람 개개인이 한울님이 인격적인 존엄성을 부여한 존재이며 그러한 한울을 믿음으로써 모두 동등하게 됨을 의미한다). 50년대 삼가저수지가 축조되면서 「달밤에도 가뭄이 든다」고 할 정도로 한해가 심했던 장내리도 옥토로 바뀌었다. 여기서 3대째 사는 칠순을 넘긴 선병묵씨는 『지금은 논으로 변한 대도소 자리는 대추고을 답게 대추나무가 우거진 곁에 큰 기와집이 있었으며 문중이 소유했다는 얘기를 백부에게 들었다』고 연구자들에게 증언한 바 있다. 돌성 자리는 충북대 차용걸교수가 지난해 추수가 끝난 논사이에서 발견했다. 처음보는 순간 『무슨 성이 저래』하는 실망의 울림이 입가에 흘러나왔으나 돌하나 하나에 회한의 마음을 풀고 새세상의 염원을 담은 손길이 미쳤음을 생각하니 자책의 감정이 솟구쳐 그러한 짧은 소견을 씻어버렸다.
최근들어 보은 일대를 중심으로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던 동학 관련 유적이 하나 둘씩 발견되고 있다. 성터에 이어 역시 충남대 신영우교수에 의해 동학군의 최후 전투가 벌어졌던 보은읍 종곡리 북실 동학군 집단 매장터와 광화문 복합상소의 상소문을 쓴 청원군 남일면 신송리(솔뫼마을) 손천민의 집터가 발견됐다. 특히 손천민의 집터에는 동학이 배척하던 천주교와 뿌리를 같이하는 교회가 들어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해주었다. 천주교측은 관계 당국과 협의를 거쳐 관련 유적을 복원하거나 기념비를 세우는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보은군 공보실장으로 향토사연구가이기도 한 김건식씨는 『보은이 동학혁명을 예비하고 최후의 격전지가 된 고장인 만큼 역사의 의미를 되살리는 작업의 추진을 연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1883년 4월34일,교도들은 또다시 실망을 삼키며 보은을 뒤로 한채 흩어졌다. 실망은 절망이 됐지만 그들의 희구·희망은 일년뒤 동학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하지만 그 희망 마저도 외세의 간섭으로 무너져 수많은 희생자들의 넉은 한 세기가 흐른 오늘까지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동학의 평가가 올바로 내려질 때 구천에 떠돌던 그들의 고귀한 넋이 안식처를 찾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보은땅을 뒤로 했다.<이기욱기자>이기욱기자>
◎「보은취회」 왜 열렸나/동학교도 탄압 끊임없자 지도부 위기감/종교적 성격 탈피 사회개혁 참여로 선회
동학혁명의 불씨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 보은 취회가 있기까지에는 공주·삼례 취회와 광화문 복합상류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보은 취회가 보국안민과 척왜양창의를 내건 사회개혁 운동의 성격을 띠었는데 반해 앞서의 세단계는 1세교조 최제우(1824∼64년)의 억울한 죽음을 달래주고 동학을 인정해 달라는,교조 신원에 초점을 둔 순수한 종교적 운동이었다.
동학은 최제우가 포교에 나선지 3년만인 1863년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체포돼 이들해 대구에서 처형되면서 한땐 주춤했으나 2세 교조 최시형(1827∼98년)의 지도 아래 교단을 정비하고 1880년대 이후 교세가 충청 전라 경상도의 삼도를 중심으로 확장돼 갔다. 그러나 교세의 확장과 반비례해서 각 고을 수령을 주축으로 한 지배계층의 동학에 대한 탄압은 도를 더해갔다.
동학 지도부는 자구책의 일환으로 최시형의 주도아래 동학의 공인을 목표로 교조 신원운동을 결심하게 됐다. 드디어 1892년 10월 공주 취회가 개최됐다. 신원의 뜻은 달성못했으나 감사로부터 관리의 탐학을 금한다는 감결(상급기관이 하급기관에 내리는 공문)을 얻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이어 다음달초 삼례에서 취회를 열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교조 신원운동은 왕조 정부가 동학을 금하기 때문에 지방 관헌을 대상으로 성공할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지도부는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상소의 방법을 택하게 됐다.
1883년초 보은에 교단사상 최초로 대부소(총본부)를 설치하고 박광호 등 40명을 서울로 올려 보내 광화문에서 3일 낮과 밤을 통곡하게 했다. 고종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한다면 소원대로 시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해산하는 수밖에 없었고 오히려 탄압은 더욱 심해갔다. 최시형 등 지도부는 이에따라 3월10일 최제우의 기일을 기해 전국의 교도로 하여금 보은에 모이도록했다.
보은 취회가 종교적 성격을 뛰어넘어 사회개혁과 민족운동의 방향으로 흐른 배경에는 교세의 확장과정에서 교단조직을 토대로 사회개혁을 추진해 보자는 뜻을 지닌 교도의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학계는 분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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