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19일 낮 서울의 하늘은 무겁게 가라앉아 우중충하기만 했다.이날 중앙청(현 국립중앙박물관)서 남대문까지 이르는 대로를 꽉 메운 학생들은 「3·15 부정선거 다시하라」 「독재정권 물러나라」고 외쳤다. 바로 노도였다. 이따금 경무대(현 청와대) 근처까지 진출을 시도했다가 경찰의 총탄을 맞아 부상한 학생들을 실은 차가 경적을 울리며 데모군중들을 갈랐고 차옆문에서 동료가 피묻은 옷을 흔들며 「끝까지 싸우자」고 외칠 때마다 군중들은 더욱 흥분하곤 했다.
그날 광화문 네거리의 데모대속에 있었던 필자는 그토록 철벽같던 거대한 권력이 성나고 눈뜬 시민정신에 의해 뿌리째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불법과 불의가 양심과 정의에 의해 밀려나는 짜릿한 흥분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 7일뒤 이승만대통령이 하야하자 학생들은 거리청소와 질서유지에 나서다가 뒤처리를 기성정치인들에게 맡기고는 학원으로 돌아갔다.
학생들의 기대와 요구는 혁명과업 완수,즉 민주개혁을 단행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성정치인들은 조금도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허정 과정수반은 『혁명과업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추진한다』고 했지만 실제 어느 것 하나 확고하게 실천을 하지 못했고 장면정권 역시 이것 저것 눈치를 살피다가 10월11일 부상자들의 의사당 불법난입사건이 있은뒤에야 개헌을 하고 반민주행위자 처벌법 등 4개법을 제정했으나 별 진전없이 5·16 쿠데타로 실각하고 만 것이다.
4·19정신과 이념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민주화,자유화 그리고 사회정의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정권이 12년동안 자행한 독재와 장기집권 등 반민주적인 불법행위와 부정부패를 뿌리뽑고 정의롭고 자유로운 새로운 민주국가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흔히들 4·19혁명은 실패했다고들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학생들 자신이 시민혁명을 주도하고 나서 정권담당 능력이 없어 집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라고 말한다면 지극히 피상적인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4·19혁명은 단기간에 완성될 수 없는 것이며 불가피한 장애물에 부딪친다해도 결코 실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민주와 자유,사회정의의 완성은 끊임없는 국민적 노력에 의해 계속 추구해야할 최대의 목표요,이상이기 때문이다. 4·19는 우리에게 참으로 뜻깊은 교훈을 주었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고귀함을 일깨워주었고 부정부패는 공직사회와 권력은 물론 나라 자체를 썩고 병들게 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 것이다.
때문에 4·19는 반민주적인 찌꺼기들을 쓸어내고 부정부패의 요인들을 발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이를 활용하지 못한 것은 당시의 집권세력과 국민모두의 책임이라고 봐야 한다. 그뒤 군사정권이 두차례에 걸쳐 개혁을 호언했으나 결국은 무위와 실패로 끝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 김영삼정부가 의욕적으로 단행하고 있는 개혁의 뿌리와 연원은 4·19정신에 두어야 할 것이다. 4·19직후 출범하는 문민정부들이 당연히 해야할 과업을 외면한데다 그뒤 쿠데타 등으로 출연한 강권정부들이 저지른 반민주적 악폐와 부패까지 차제에 바로잡고 척결하는 대역사다. 오늘날 국민들이 김 대통령의 큼직한 개혁조치에 박수와 지지를 보내는 소이도 여기에 있다 하겠다.
취임한지 불과 57일동안에 단행한 핵폭탄 같은 공직자 재산공개를 비롯,비리척결에 대다수 국민들은 후련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을 언제까지 이같은 중대조치식,단칼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반민주적 요소와 부패가 기생할 수 없도록 법명을 통해 개혁을 제도화해야 할 뿐더러 국민의 흥분과 열광식이 아닌,차분하게 지켜보고 협조 호응할 수 있도록 각 분야별 추진 계획표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취지가 훌륭한 개혁이라도 그 성패는 국민의 공감과 협조에 달려있는 것이다. 갑작스런 열광은 빨리 식을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민은 머리를 식혀가며 추진하는 김 대통령의 개혁스타일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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