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손진태선생 전집」 전6권을 빌려왔다. 뭐,대단한 학구열이 뻗쳐서가 아니라,해방후 우리나라 역사학계에 새 바람을 일으킨 것으로 평가되는 남창 손진태(1900∼1950 납북)의 신민족주의 사관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싶었고,또 『나는 신민족주의 입지에서 이 민족사를 썼다』는 말로 시작되는 그의 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그 글은 전집 제1권에 수록된 「한국민족사개론」(48년)의 서문이다. 이 글에서 그는 왕조시대에도 민족사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그것은 진정한 민족주의일 수가 없다고 단정한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민족주의는 민족 전체의 균등한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듬해에 펴낸 「국사대요」 서문에서 그는 그런 생각을,「민주주의적 민족주의 곧 신민족주의」란 말로 명쾌하게 요약하고 있다.
이로 보아 그의 사관은 대강 짐작할 수가 있을듯 싶으나,진단학회의 주요 멤버였고 정부수립 초기의 문교부차관이었던 경력에 비추어서는,꽤 「열린 생각」을 가졌던 이 같다. 그의 납북을 퍽 아쉬워하는 후배 사학자가 많음에 수긍이 간다.
그런데 그의 전집을 뒤적이다,나는 생각밖의 「발견」을 하나 했다. 48년에 그가 써낸 「우리 민족이 걸어온 길」에서다.
본문 61쪽,원고지 2백장분량이나 될까 싶은 이 소책자는 순 한글이다. 순한글일뿐 아니라 어려운 한자말을 다 순한 우리말로 옮겨 놓고 있다. 장의 이름도 「성읍 국가시대」를 「고을나라시절의 살던 모양」이라했다.
재미있다 싶어서 통독하는중,「이조시절의 살던 모양」에 이르러,그가 조선왕조의 일어남과 세종임금대를 중심한 그 황금시대를 설명하면서,그 까닭의 큰몫을 청백리가 많음에 돌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 짧은 통사에서,왕조 초기 청백리를 하윤(1347∼1416) 정갑손(?∼1451) 황희(1363∼1452) 맹사성(1360∼1438) 허강(1369∼1439) 유관(1346∼1433) 등 명신들의 청빈일화를 소개하는데 한쪽 이상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때의 충무공보다 대접이 후하다.
그래서,그 이듬해 나온 「국사대요」를 찾아보니,역시 왕조 초기의 문물이 융성함을 서술하면서,「청백리와 학자의 배출」이란 절을 따로 세워놓고 있다. 다른 국사책에서는 미처 못본 편제다. 나라가 흥하자면 청백리가 배출되어야 한다는 남창의 생각을 읽을 수가 있다.
그가 소개한 청백리의 여러 일화에서,오늘에 특히 되씹히는 것은 정승 정갑손이다. 그는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자,『내 아들은 학문이 아직 변변치 못하거늘,내게 아첨하느라 급제시킨 것이니 용서할 수 없다』하여,기어이 그 시험관을 탄핵하여 파직하게 했다. 이에 그의 어머니가 크게 노했으나 이마저 뿌리쳤다는 것이다. 아들 딸의 대입부정으로 줄줄이 코가 꿰이는,요즘의 부정과는 어딘가 다르다.
더욱 귀 따가운 것은,일화뒤의 끝의 맺음말이다.
『앞으로 민주주의의 민족국가에 있어서는,관리는 반드시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며,그렇게 되도록 나라의 법률과 제도를 만들어야 할 것이요,또 우리 국민 스스로가 그것을 감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줄을 바꾸어 이어지는 남창의 말은 더욱 매섭다.
『그러나 백년쯤 뒤로부터는 이러한 좋은 풍속이 점점 없어지고… 정치가 썩어지게 되어… 임진왜란의 큰 화를 입게 되었다』
그의 어투에는 왕권 전제시대의 청백사상에는 그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통찰이 스며있다. 혼란스러운 건국 전야,투철한 그의 사안은,몇달뒤에 발족할 새정부의 가장 큰 다짐이 청백에 있어야 함을 꿰뚫어 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이 걸어온 길」의 이 대목을 읽자니,「깨끗한 민주주의」란 말이 떠올랐다.
왕정 전제시대의 민족사상이 진정한 민족주의일 수가 없듯,그 시대의 깨끗함에는 나름에 한계가 있다. 그것은 임금 한사람에게 달린 것이요,그 말고는 깨끗함의 보장이 없다. 우리가 경험한 권위주의 여러정부가 번번이 깨끗함을 말하고도 실패한 까닭이 여기 있다.
바꿔 말하면,민주주의라야 깨끗할 수가 있다. 깨끗해야 민주주의라고 할 수가 있다. 민주주의를 하려면 깨끗해야 한다.
새정부 문민개혁에 기대를 거는 까닭이 이것이다. 문민개혁의 목표와 성격 또한 분명하다. 그것은 <깨끗한 민주주의> 다. 깨끗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실현하고,깨끗함으로써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것이다. 깨끗한>
이처럼 문민시대의 목표와 성격이 분명하다면,그것은 중단할 수 없는 개혁이다. 오히려 개혁을 프로그램화해서,개혁이 한때 바람으로 그침을 막아야 한다.
근래 보도는 이를 위한 구체적인 작업이 청와대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개혁을 위한 1년 계획과 5년의 장기 계획을 만들어 추진한다는 것이다(4.14 한국일보 1면). 진작 그랬어야 할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개혁이 일과성 아님을 모든 사람에게 확인시켜야 하고,개혁의 지속을 보장해야 한다. 개혁방안에 여론과 지혜를 집중시키고,불안을 덮어야 한다. 개혁을 법제화·제도화함으로써 부정척결 아닌 자정이 가능케해야 한다.
그래야만 「깨끗한 민주주의」는 실한 열매를 맺을 수가 있다.
그런 뜻에서 청백을 위한 법제와 국민감시를 말한 남창의 통찰은 되새길 가치가 있다. 그런 뜻에서 나는,가슴 철렁한 폭로기사보다는,견실한 개혁프로그램의 보도를 더 읽고 싶다.<상임고문>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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