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진급·중부권 인사 솔깃/지도부 “뭔소리냐” 불끄기재산공개 파문으로 홍역을 치른 민자당에 때아닌 선거구제 논의가 돌출했다.
한 고위당국자가 사견임을 전제로 밝힌 대선구제 주장이 당내외에 적지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청와대와 당지도부는 서둘러 선거구제 논의를 진화하려 애쓰고 있으나 이 문제는 권력구조,정치인 각자의 이해,여당의 향후 진로,재산공개 파문에 따른 「물갈이론」 등과 맞물려있기 때문에 그리 쉽게 쟁점에서 소진될 것 같지가 않다.
이번 논란의 발단은 민자당 정책결정의 최고 책임자인 김종호 정책위 의장이 지난 10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깨끗한 선거를 위해서는 대선거구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부터. 지난 2월 새정부 출범을 전후해서도 비슷한 논의가 있었지만 청와대측의 「소선구제 불변」 입장으로 금세 진화됐다가 이번에 다시 되살아났다.
김 의장의 대선거구제 주장이 전해지자 민자당은 이내 벌집쑤신듯 요란해졌다. 최형우 사무총장을 비롯 김덕룡 정무1장관 등 이른바 「민주계 실세」들은 『뭔 소리냐』고 펄쩍 뛰었다. 한마디로 개혁이 한창 진행중인 때에 무슨 뚱딴지같은 선거구제 변경주장이냐는 얘기이다.
12일 상오 열린 확대 당직자 회의에서도 김 의장 발언이 집중적인 표적이 됐다.
청와대 보고 배석차 김 의장이 불참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 당직자들은 『정치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당직자의 개인적 의견발표를 자제키로 한다』는 결의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신중하기 이를데 없는 김종필대표까지 직접 나서 『정치현안에 대해 당직자가 개인적인 의견이란 단서를 달고 한 얘기라도 당의 의견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며 「자제」를 당부할 정도였다.
민자당이 이처럼 선거구제 논의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만큼 이 문제가 향후 정치권에 있어서 「태풍의 눈」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선거구제론자들은 현행 소선거구제를 「돈드는 정치」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있다. 소선구제하에서는 기본적으로 지구당 유지경비가 필요할뿐더러 선거때 전 유권자를 상대로 필사적인 소모전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면 대선거구제에서는 유권자수가 최소한 5∼6배로 늘기 때문에 상시적인 지구당 유지나 자금에 의존하는 선거운동방식이 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명분론은 아직 민자당내에서 크게 득세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현행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당위론을 등에 업고 급속히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는게 대선거구제론자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대선거구제를 둘러싼 정파간,지역간 또는 의원 개인간의 이해관계는 깨끗한 정치라는 명분이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우선 대선거구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중진급과 중부·호남권 인사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1등만 뽑는 현행 제도로는 당분간 민자당의 의석확보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호남권에서 대선거구제 주장은 솔깃한 얘기일 수 있다. 중부권도 민자당 독식이 가능했던 영남권에 비해 점차 불리한 여건에 놓일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중진급을 중심으로 대선거구제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형편이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대선거구제론자들이 대체로 민정계라는 사실. 따라서 당주변에서는 대선거구제가 내각제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대선거구제 주장에 대해 가장 반발하는 쪽은 역시 민주계를 중심으로 한 영남권 인사들. 이들은 권력체제 변화와 관련한 대선거구제 주장을 경계하면서 「돈안드는 제도」라는 명분론에도 제동을 걸고 있다.
부산지역의 한 의원은 『김영삼대통령은 유권자가 많을수록 선거에 돈이 많이 들어간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대선거구제=돈안드는 선거」의 등식을 반박한뒤 『대선구제는 다음번 선거에 불안을 느끼는 중부권 일부 인사들의 주장일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또 재산공개 파문으로 입지가 약해진 일부 중진들이 대선구제로 살길을 찾으려한다고 비난하기까지 한다.
더욱이 김 대통령을 비롯,여권의 핵심부는 개혁이 한창 추진되고 있는 시점에 당내 분란을 야기할 수도 있는 선거구제 논의가 돌출하는 것에 불쾌감을 분명히하고 있다. 최형우총장은 이날 『선거구제 문제는 과거와 같이 통치권 유지차원에서 유·불리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문민정부가 근착되고 정치문화가 발전한뒤 통일에까지 대비해서 심사숙고해 선택해야 한다』며 『지금은 논의할 단계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평소 신중하기로 이름난 김 의장의 대선거구제 주장은 적지않은 중부권 중진급 정치인들의 의사를 대변한 것이라는 분석도 만만치않아 이 문제는 잠복성 이슈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정광철기자>정광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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