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자 처세 절묘”… 「생존의 미학」 암중모색김종필대표는 민자당의 대표이지 더이상 공화계의 대표가 아니다. 김 대표 주변인사들이 요즘 하는 말이다.
김 대표는 9일이면 그동안의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이 된다. 이날 열리는 상무위원회에서 당헌이 개정되기 때문이다.
「최고」라는 두글자가 지워지는 것이지만 이 개칭은 글자수가 줄어드는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3당 합당의 부산물이자 계파안배 차원에서 두었던 최고위원과,이들의 대표격인 대표최고위원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게 됐다. 민자당은 최소한 형식논리상으론 3당 합당의 때를 완전히 씻게 되는 셈이다. 자연스럽게 「대표」자리도 계파성격이 가미됐던 지난날과는 달리 순수한 당대표의 위상을 갖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김 대표 주변인사들이 공화계가 아닌 민자당의 대표임을 강조하는 것에 일견 수긍이 간다. 물론 이같은 표현속에는 김 대표의 위상이 상승되었다고 널리 알리고 싶은 김 대표측의 「희망」도 스며있다.
그러나 계파보다는 당의 얼굴임을 내세우는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김 대표의 현재 모습이 너무 처연하다. 공화계 모임을 의식적으로 자제하는 김 대표의 태도는 당대표로서의 면모를 살리려는 노력으로도 볼 수 있다. 반면 이는 다른 중간보스급들과 마찬가지로 「몸낮추기」로 해석되는 측면도 있다.
김영삼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력과 개혁돌풍앞에서 독자적 목소리를 내기에는 바람이 너무 거세다. 이른바 「생존의 미학」이 다시 요구되는 시점인지도 모른다.
김 대표는 최근들어 청구동 자택에서 외부인사를 일체 만나지 않는다. 새벽 5시면 기상하지만 신문과 책을 읽고 NHK 위성방송을 시청하는 것외에 출근까지의 3시간을 정치인으로서 사용하는 법이 없다. 예전 같으면 아침일찍 청구동을 찾았을 측근들도 자연 자택방문은 삼가고 있다.
휴일에 골프를 하지 않는 것은 최근의 분위기상 그렇다치더라도 김 대표는 좋아하는 그림도 그리지 않는다. 한 측근은 『그림도 생각이 복잡하지 않아야 그리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3월초만 해도 김 대통령의 강한 개혁드라이브에 「온고지신」론과 「백리길 속도조절」 주장 등으로 문제제기를 하는듯했던 김 대표는 이제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특유의 은유화법마저 구사하지 않는다.
이렇듯 달라진 그의 모습은 외견상 당내 2인자의 위치에도 불구,점차 격하돼가는 실질적 위상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9일의 당헌개정에서 바뀌는 것은 대표직명뿐만이 아니다. 최고위원제가 폐지됨에 따라 과거의 「총재가 최고위원과 협의하는」 당운영방식도 없어지게 됐다. 총재의 권한이 더욱 막강해진 반면 대표의 영향력은 그만큼 축소된 것이다.
게다가 대표위원의 임기제가 당내 논란끝에 도입되지 않은 것은 김 대표의 정치적 장래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있더라도 임기제가 현 체제에서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하겠지만 김 대표로선 이제 명분상으로 자신의 「자리」를 완전히 김 대통령에게 위탁해놓은 셈이다.
김 대표는 급격한 쇠락현상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최대계파였던 민정계가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 더욱 그렇다. 오히려 김 대표가 현재의 위상을 유지하는 것은 3공때부터 2인자 지키기에 단련된 그의 탁월한 처신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실제 김 대표는 이미 14대 총선을 통해 현저한 세위축을 겪었다. 공화계의 대거 낙선은 3당 합당시의 5대 3대 2 지분을 그대로 유지하는데 결정적으로 장애로 작용했다. 민주계 인사들은 후보경선전까지만해도 당시 김영삼대표에게 우호적이라할 수 없었던 그가 지금 절묘한 줄타기로 세이상의 예우를 받고 있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김 대표의 위상이 흔들리는 것은 단순히 세의 차원만은 아니다. 지난 3일 있었던 광명개편대회는 김 대표의 피곤한 처지를 상징해주는 단적인 사례였다.
이 지역 보궐선거 공천자로 임명된 손학규위원장은 이날 인사말을 통해 개혁되어야 할 대상들을 열거했다. 운동권 출신이자 진보적 교수였던 손 위원장은 『역대정권이 개혁을 주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개혁주장은 부패와 유착돼있었거나 물리적 힘에 의존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며 구 시대를 비판했다.
곧바로 김 대표의 격려사가 이어졌다. 『민주주의를 자율적으로 이룩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피땀을 흘려 이룬 것』이라고 김 대표는 말했다. 완곡한 표현이었지만 지금의 민주주의는 과거,즉 60∼70년대 경제발전과 결과라는 얘기로 들렸다.
김 대표는 「손 동지」라는 표현으로 어색함을 피했으나 「개혁되어야 할 대상」의 범주가 자신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김 대표의 위상이 실추되어가고 있다지만 현 단계에서 그의 역할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김 대통령으로서도 아직 화학적 결합기에 있는 민주당을 원만하게 관리해나갈 대리인이 필요한 것이다. 김 대표가 최적의 인물이라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민자당내에 아무도 없다.
때문에 김 대통령의 뜻을 직접 하달받아 당을 꾸려나가는 민주계 당직자들도 외견상으로는 김 대표를 깍듯이 떠받든다.
그러나 당내에서 김 대표의 역할기간을 「길어야 1년」으로 보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강한 바람에 맞닥뜨리기보다는 잠시 누워있다 다시 일어나는 억척스러운 생명력의 김 대표가 급변하는 정치상황속에서 어떻게 활로를 찾아갈 것인지에 주목된다.<정광철기자>정광철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