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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지기/박찬식(화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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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지기/박찬식(화요칼럼)

입력
1993.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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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말기 일본 동경의 우에노(상야) 동물원은 맹수들의 처리문제가 골칫거리였다. 연합군의 공습이 매일 계속되던 때여서 동물원에 폭탄이 떨어질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동물 우리가 부숴져 맹수들이 거리로 뛰쳐나온다면 큰 일이었기 때문이다. 동물원 관리책임자들은 회의를 거듭한 끝에 모두 독살하기로 결정했다. 총살해버리면 간단하지만 난데없는 총소리가 시민들을 불안하게 할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다른 짐승들은 대부분 독이 들어있는 먹이를 먹고 죽었는데 코끼리만은 먹으려하지 않았다. 동물원측은 이 코끼리를 아사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생각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코끼리는 허기가 져 쓰러져 있다가도 관중이 가까이 오면 일어나 있는 힘을 다해 재주를 부렸다. 굶어 죽을 때까지 그랬다는 것이다. 재주를 부리면 먹이를 줄 것으로 알았을 것이라고 당시 사육사는 말했다. 이 코끼리는 동물원을 찾아오는 아이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특별히 재주를 가르치고 길을 들인 아주 영리한 놈이었다. 15년쯤 전 어느 일본신문에 실린 동물원 비화다. 코끼리는 마지막 꿈속에서 먹어도 먹어도 싱싱하고 맛있는 풀이 얼마든지 펼쳐있는 넓은 초원 한가운데 서있는 꿈을 꾸었을지 모른다.

길들여지기란 그 끝이 이렇게 비참할 수도 있다. 광복후의 혼란과 6·25전란,30년간의 군사통치속에서 사회의 모든 권위가 붕괴하고 금력과 권력이 세상에서 행세하는 유일한 가치로 사람들을 길들여왔다. 사람들은 문화적 폐허속에서의 허기를 돈과 땅으로 채우려했고 어느틈에 그런 삶의 방식에 모두 익숙해졌다.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은 신분을 보장하는 담보가 그만큼 튼튼함을 의미했다. 그 탐욕의 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그냥 그런 세태를 길들여져 온 것이다. 정부에 의해 이끌려가는 개혁이 아닌,「우리의 개혁」은 이 길들여지기의 허망함을 깨닫는 일에서부터 시작돼야 할지 모른다.

검사시보를 막 끝낸 한 청년검사가 지방도시의 검찰청에 부임했다. 상해혐의로 입건된 젊은이가 경찰에서 넘어왔다. 검사는 이 젊은이가 실수로 일을 저질렀다는 점과 창창한 장래를 고려해서 기소를 유예하고 방면했다. 아들이 경찰에 잡혀간 후 근심에 싸여있던 젊은이의 어머니는 얼마나 기뻤던지 검사가 하느님같이 보였다. 어머니는 정성껏 떡을 만들어 가지고 검사의 사택을 찾아갔다. 그러나 아내로부터 이 얘기를 들은 검사는 그 다음날 당장 젊은이의 어머니를 사무실로 불러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한 다음 떡보따리를 돌려주어 보냈다. 그 어머니가 받은 충격이 어떠했을까.

40년후 검찰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퇴임을 앞둔 어느날 그는 기자의 방문을 받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검찰을 대표해서 국회 답변도 하고,정치인 오직사건 수사를 지휘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던 그의 입에서는 뜻밖에도 옛날의 떡보따리 얘기가 나왔다.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지금 같으면 고맙게 받겠다. 그 대신 답례로 과자라도 사서 건네주며 아들을 잘 길러 달라고 위로할 것이다』 얼마전 일본 조일신문에 실린,신임 검사들의 올바른 복무자세를 당부하는 글속에 들어있는 예화다.

나이와 더불어 생각에 여유가 생긴 것이지만,직무와 관련해 절대로 물건을 받아선 안된다는 검사로서의 직업윤리에 충실하려 하는 한 그는 그때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마찬가지로 행동할 것이 틀림없다. 오히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이처럼 추상같은 직무윤리일 것이다. 개혁의 시대는 예외와 탐욕에 길들여진 노검사의 그럴듯한 관대함보다는 길들여지기에 저항하는 청년검사의 순수함과 단호함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개혁」을 위해 지금 검찰이 할 일은 재산공개 과정에서 범법행위가 명백히 드러난 공직자를 단호한 자세로 수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않는다면,문화적 가치와 도덕적 권위가 붕괴된 사회에서 고지식하게 규칙을 지키다가 번번이 새치기를 당하고 불법으로 치부한 자들에게 능멸을 받아온,그 무력감과 무능함을 한탄하며 소주잔을 눈물로 채워 마셔온 시민들의 「김영삼정부」에 대한 기대를 배신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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