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시절 불우생활은 공통점/「전후세대」·「도박사」 표정 달라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둘다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불같은 성격의 서부 시베리아 농장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툭하면 매질을 해댈 때 소년 옐친은 집에서 기르던 염소를 붙잡고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곤 했다. 생후 5개월만에 생부를 잃고 어머니가 다섯번이나 결혼한 서자 클린턴은 알코올중독에 걸린 계부가 걸핏하면 식구들을 때리자 10대 초반이었던 어느날 그에게 덤벼들었다. 『식구들을 때리려면 나부터 치라』
그러나 옐친과 클린턴의 공통점은 그것 한가지로 끝날지 모른다.
2천명이 넘는 보도진이 몰려든 이번 정상회담을 취재하면서 운좋게도 지척에서 두 대통령의 공동 기자회견을 취재했던 기자는 두사람의 성격이 얼마나 대조적인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옐친이 웅변가라면 클린턴은 중학교 선생님에 비유될 정도로 풍기는 인상이 달랐다.
옐친이 「보스」라면 클린턴은 거리에 지천으로 깔려있는,미남자이긴 하지만 이렇다할 특징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20세기 중반이래 세계역사와 지도는 흔히 미·소 정상회담에서 결정되었고,발표문 못지않게 서로가 서로를 가늠해보는 「조우」였으며,거기서 주고받은 「인상」이 역사적 사건을 유발하기도 했다.
가장 좋은 예가 1961년 6월 존 케네디와 니키타 흐루시초프의 대좌. 흐루시초프는 케네디를 「경량급」으로 판단,회담 2개월후엔 베를린장벽을,4개월후엔 쿠바 미사일 위기를 유발했다.
지미 카터는 1979년 빈에서 브레즈네프의 볼에 키스한후 전략무기 제한협정에 서명했으나 키스장면에 미국인들이 혼비백산,상원의 인준을 얻는데 실패했다.
레이건은 1986년 레이캬비크에서 고르비가 「스타워즈」 계획의 중단을 요구하자 문을 박차고 퇴장했다. 이제 시대는 변했다. 뉴욕 유니언대학 정치학 교수 로버트 살렛은 밴쿠버 정상회담을 「없었던 행사」라고 규정지었다. 그러나 해리티지재단의 더글러스 시이는 새로운 러시아의 향방을 결정지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정상회담」이라며 이번 회담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러시아 1천년 역사상 첫 민선 지도자이자 세계가 다 아는 도박사 옐친,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잔재가 없는」 첫 미국 대통령 클린턴. 둘은 서로를 어떻게 가늠했을까.<밴쿠버=본사 조병우 시애틀지시장>밴쿠버=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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