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또다시 내란으로 치닫고 있다. 국민의 열광적 지지를 받으며 고르바초프를 물리치고 러시아의 대통령직에 오른지 일년이 크게 넘지않은 옐친은 그의 권력이 상징하는 탈공산화와 민주화 과정이 역전될 수도 있는 고비를 맞고 있다. 옐친은 자신에게서 비상대권을 박탈해 버린 인민대표회의의 결정을 무시하고 국민의 직접적 심판을 받겠다고 선언했고,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이런 상황에서도 옐친에 대한 지지를 재천명하고 나선 것은 러시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서는 이미 다른 카드가 남아있지 않음을 인식한 때문이다.○구 공산당세력의 야심
사태의 진전에 대한 전문가들의 전망은 어느모로 보나 비관적이다. 우선 옐친의 이번 결정을 반헌법적이라고 규정한 하스불라토프 세력이 4월25일까지 옐친을 그대로 대통령직에 놓아둘지가 의심스럽고,국민의 신임을 묻는 표결이 성사된다해도 국민이 여전히 옐친을 지지해줄 가능성이 높지 않다.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 수반되는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와 빈부격차의 발생,공공질서의 전반적 붕괴 등으로 지칠대로 지친 일반국민들은 이제 자유고 민주화고 그만두고 차라리 예전 공산당 치하에서처럼 정부가 강력한 통치권을 발동하여 최저한의 생계라도 보장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고,당면한 어려움에 대한 책임을 고르바초프에서 옐친으로 연결되는 개혁세력에 돌리려는 경향이 팽배해 있다.
현재의 인민대표회의의 구성원들은 1991년 8월 고르바초프를 제거하려는 반개혁세력의 쿠데타가 실패하기전,아직도 구 공산당 세력이 개혁을 주동하고 있을 당시에 선출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고르바초프나 옐친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재빨리 개혁세력으로 변신함으로써 무너져가는 권력기반을 새로 구축하고자 했던 옛 권력층(노멘클라투라) 출신이다. 민주화와 시장경제로의 전환의 어려움속에서 개혁에 대한 국민의 회의가 일게됨에 따라 그들은 또한번 입장을 바꿈으로써 지배세력으로서의 자리를 다시 굳히려고 하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올바른 성찰을 통한 환상의 극복과 감정적 속단의 절제,그리고 어려움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의지의 발동이 지금처럼 러시아 국민들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순간이 없다. 정치적 대화를 통해 이 난관이 올바른 방향으로 타개되지 못하고 역사가 역전할 경우,러시아 국민전체가 빈궁과 유혈투쟁의 수렁에서 헤어날 수 없음은 물론 인류전체의 안녕이 위협받게 될 것임이 틀림없다.
러시아의 역사적 비극의 핵심은 집권층과 국민 사이에 신뢰와 이해가 구축되지 못하고 역사적 현실을 직시할 능력이 없는 국민의 태도가 항상 권력에 대한 맹목적 기대 아니면 맹목적 거부라는 양극 사이를 오고간데 있었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개혁을 부르짖고 나섰을 때 그는 국민에게 선심을 쓰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70년에 걸친 공산당 독재의 결과 소련은 군사적으로는 비대해졌으나 경제는 파산지경에 이르렀고,특권층화되어 부패해버린 공산당 정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1917년 혁명전야 전제정권에 대한 태도를 방불할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과감한 체제개혁없이는 소련이라는 정치체제가 더이상 유지될 수 없음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집권층·국민간의 괴리
냉소적으로 본다면 고르바초프의 민주화정책은 공산당이 저질러놓은 역사적 실수에 대한 수습을 이제야 주인으로 다시 인정받는 국민이 또 한번의 초인간적 절제로 책임져 달라는 호소에 불과한 것이었다.
고르바초프는 고전적 의미에서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그에게는 현실을 현실로 선명하게 지적하고 직면할 통찰력은 있었을 망정 그것에서 도피할 수 있는 재주는 없었다. 그의 개혁정치에 대한 기대와 호응이 열광적이었던 만큼이나 개혁의 전진과정에서 드러나는 어려움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돌리는 국민의 심판도 가혹했다. 체제의 깊은 내막 사정은 모르고 하루 하루 연명하는데에 전력을 쏟아야했던 일반 서민의 단순논리로 본다면 고르바초프가 개혁을 부르짖기전까지는 소련은 세계의 강대국이었고 최저한의 사회질서와 생필품의 공급에는 문제가 없는듯했다. 하루 아침에 그 체제가 와해되고 러시아가 세계의 비렁뱅이로 전락하는 속에서 벼락부자들이 속출하고 범죄가 판을 치는 것을 국민은 고르바초프를 비롯한 개혁세력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에 대한 국민의 이러한 오판은 개혁으로 권력독점의 기반을 상실하고 할 수 없이 민주화 추세에 가담했던 구 공산당 특권층이 바라던 대로였다. 그러나 공산주의로 돌아가면 전과 같이 사회주의 이상이 살아날 수 있다고 그들이 국민을 현혹한다면 그야말로 환상이고 역사에 대한,그리고 러시아 국민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다. 그들 정치인은 국민들과는 달리 구 체제가 왜 파산을 할 수 밖에 없었던가를 잘 알고 있는,책임의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환상 버려야
고르바초프,옐친,하스불라토프,또는 다른 누구가 지도자의 위치에 선다해도 지금의 전환기적 악순환속에서 국민의 인기를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같은 개혁주의 노선을 추구하던 고르바초프에 대해 옐친이 좀더 이해와 관용을 보이고 합심하여 국민을 이끌어 나갔다면 지금과 같은 곤경을 모면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정치가 잘되든 못되든 삶의 주인공은 결국 국민이다. 러시아의 국민이 선택없는 전환의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공산주의의 환영에 일시적으로 다시 매료되어 더 큰 비극의 길로 접어들지 않기를 간절히 비는 마음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