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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의 귀향(장명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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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의 귀향(장명수칼럼)

입력
1993.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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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고 병든 한 공산주의자가 내일 판문점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간다. 6·25때 인민군 종군기자로 내려와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1952년 체포됐던 이인모씨(76)는 19일 북한으로 가서 아내 김순임씨(66)와 딸 현옥씨(44)를 만날 것이다.그를 조건없이 북에 돌려보내는 것에 반대하던 사람들도 그의 귀향을 눈물겹게 바라보고 있다. 그는 남한에 머물렀던 사십여년중 34년을 감옥에서 보냈으며,끝내 전향을 거부하고 공산주의자로서의 순결을 지켰다. 그가 33살 젊은 나이에 집을 떠날 때 더 젊은 23살의 아내는 어린 딸을 안고 대문앞에서 울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분단의 희생물로 되돌릴 수 없는 사십여년을 고통속에 살았다.

우리는 지금 북한을 상대로 인도주의 실험을 시작했다. 인도주의란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든 달라질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다. 남한이 인도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북송하는 이인모노인을 북한은 남한의 비인도성을 규탄하는 증거로 삼을 것이다. 이인모씨는 목숨을 바쳐 사회주의와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을 지킨 혁명영웅으로 귀향하여 꺼져가는 사회주의의 불길을 돋울 것이며,남한은 그들의 혁명영웅을 탄압하고 병들게 하고 치료조차 외면한채 내다버렸다는 규탄을 받게 될 것이다. 북한은 그를 우민정치와 여론조작에 이용할뿐,이산가족문제에 대한 태도를 크게 바꾸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관심을 갖는 것은 그를 넘겨받은 북한의 반응이 아니고,새정부의 이번 조치가 다른 조치들과 어떻게 연결될 것이냐는 것이다. 정부는 이인모 북송으로 시작된 남북관계에서의 인도주의가 앞으로 어떤 틀속에서 진행될 것인지 밝혀야 한다. 그와 비슷한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에 돌아가기를 원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또 가족재회나 사상적 이유로 북에 가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보내주려고 노력할 것인가. 국가보안법과의 마찰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북을 향한 인도주의는 아직 실험에 불과하지만,우리 내부에서는 일관된 원칙아래 국민의 동의를 얻어 추진돼야 한다. 그의 북송결정이 어떤 정치적 효과를 겨냥한 돌출사건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고향에 돌아간 이인모씨는 아마도 자신이 북한에 남아있는 유일한 사회주의라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전 생애를 바쳐 40년전의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했던 그 「순결한 사회주의자」는 오늘의 북한을 지배하는 이상한 사회주의와 숨막히는 우상숭배를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 탈퇴선언으로 긴장이 감도는 판문점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늙은 공산주의자의 뒷모습에 어린 또다른 좌절의 예감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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