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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구호론 안된다/정운찬 서울대 교수·경제학(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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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구호론 안된다/정운찬 서울대 교수·경제학(한국논단)

입력
1993.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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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공화국 2기 대통령이 선출된지도 벌써 세달이 지났다. 그동안 김영삼대통령과 그 주변 인사들은 요란스럽게 개혁을 부르짖었다.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경제를 활성화시키며 사회기강을 확립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한국 건설의 구호는 국민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과거에도 새정부가 들어서면 으레 비슷한 구호를 외쳐댔지만,이번만은 이른바 문민정부가 하는 일이니 만큼 한번 기대를 걸어보자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은 어디며,누가 개혁을 추진하고,또 그 내용이 무엇인가 분명치 않아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것은 세상물정 모르는 대학교수의 노파심 때문인가?○장기적 안목 필요

사실 어떻게 보면 개혁은 별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를 움직일 게임룰을 정착시킴으로써 사회 각 부문의 비정상상태를 정상상태로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은 단지 구호만으로는 안된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치를 비롯해 경제·사회·문화 모두가 비정상적이다. 이러한 총체적 비정상상태를 정상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단기에 결판을 내려하기 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추진해야만 한다.

한편 개혁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우리나라의 경우 개혁은 위로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김 대통령이 개혁을 맡기겠다고 지명한 사람들 가운데는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정직하고 솔직하면 전문분야를 잘 알뿐 아니라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하여 신선한 감각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여론의 비난이 빗발치자 부분적 땜질은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부적격자는 많이 남아 있다.

김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빠른 시일내에 팀을 다시 짜야 한다. 선의든 악의든 오이밭에서 신발끈을 고쳐맨 사람들을 갖고는 개혁의지가 빛도 보지 못한채 시들어 버릴 것이다. 사실 3당 통합후 재벌과 구기득권층을 발판으로 출발한 김영삼정부의 개혁 아이디어를 믿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말이다.

또 하나 걱정은 개혁아이디어가 구호만 요란하지,그 내용이 추상적이어서 실체가 없다는 점이다. 한국병이 과연 무엇이며,신한국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떤 것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신경제는 아마 규제완화를 통한 경제활성화를 의미하는 것이려니 짐작되지만,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신경제 1백일 계획,신경제 5개년 계획 등을 추진한다고 한다. 이러한 발상은 경제를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나왔다고 보기는 힘들다. 지금 우리나라 경제는 경기부양책을 써봤자 장기적으로는 물론이려니와 단기적으로도 별로 효과가 있을리 없다. 돈은 이미 많이 풀렸으며 경제체질이 약해서 더이상 성장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조치들이 나온 것을 보면,6공 2기는 적어도 경제정책면에서는 3공화국으로 회귀할 모양이다.

○구체적 내용 미흡

경제학자들이 지난 10여년간 그렇게도 열심히 목표달성 위주의 경제정책에서 탈피하고자 역설한 것은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목표달성 위주의 경제정책이 낳는 부작용이 너무 크다는 것을 경험으로부터 절실히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규제완화를 충심으로 환영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하려면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그동안 한국경제는 적자생존의 게임룰에 따라 움직여 왔다기 보다는 자의적으로 그때 그때의 편의에 따라 움직여왔고 각종 불균형을 낳았다. 그 가운데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불균형은 형평성의 차원에서는 물론이려니와 효율성의 차원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규제를 완화한다면 그것은 재벌그룹의 대기업을 살찌울지는 몰라도 중소기업에 돌아가는 혜택은 별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규제완화는 결국 시장기구를 통해 자원배분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한국의 재벌그룹은 공룡처럼 커져 시장기구의 작동을 왜곡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규제완화의 전제조건은 기업이 크건 작건간에 잘하면 보상을 받되 잘못하면 가차없이 문을 닫는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어떤 형태로든지 적자생존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을 정도까지는 재벌그룹의 힘을 약화시켜야 한다. 그 방법은 재벌해체,재벌분할,상호지보금지 등 여러가지가 있겠으나,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빨리 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한국경제의 아킬레스건이라고 믿는다.

○재벌그룹 견제를

이번 개혁이 실패로 끝난다면 김 대통령은 그것에 대한 책임은 물론이려니와 3당 통합에서 비롯된 정치도덕 문란의 책임도 동시에 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김 대통령은 개혁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는 사람들을 빠른 시일내에 다시 뽑되,단기적인 경기부양책을 쓰기보다는 비정상적인 경제를 정상적으로 만들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개혁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재벌 길들이기를 통한 규제완화의 전제조건 마련에 총력을 경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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