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세때 야당 총장,정치규제 5년/우유부단 세평속 중요 순간 “강경”향후 2년간 「민주호」의 조타수를 맡게된 이기택대표는 비교적 순탄한 정치역정을 겪어왔다.
67년 7대 선거에서 29세의 나이로 입문한 이래 80년 신군부의 집권으로 5년간 정치규제에 묶였던 때를 제외하고는 의사당을 떠나지 않는 민주당 최다선 의원(7선)이다.
이 대표의 정치경력은 고려대 은사인 유진오 신민당 당수의 발탁으로 시작됐다. 4·19 당시 고려대 학생위원장으로 4·18 고대생 시위를 주도했던 것이 깊은 인상을 남긴 인연이었다.
이 대표의 정치적 입지는 76년 신민당 전당대회를 거치며 탄탄해졌다. 당권경쟁에서 이철승씨가 승리한 여파로 당내 영향력이 커진 신도환 최고위원을 보스로 한 그는 39세의 나이로 일약 제1야당의 사무총장에 올랐다. 이 대표는 2년반동안의 총장 재임기간을 이용해 독자세력을 구축하는데 성공,계파(민사회)의 보스가 되었다.
이 대표는 김영삼씨(현 대통령)와 이철승씨가 재격돌한 79년의 5·30 전당대회에서는 김씨의 손을 들어주어 승패의 중요한 변수역할을 했고 자신도 부총재를 맡았다.
신군부의 등장으로 80년 정치규제에 묶였던 그는 85년 해금되자 신민당 창당에 참여,12대때 부산 해운대구에서 당선돼 정계에 복귀했다. 이 대표는 신민당 부총재로서 김대중 김영삼 두 상임고문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비주류의 민사회를 이끌었다.
그는 87년 「이민우파동」 당시 계보원들을 이끌고 탈당,무소속으로 남았다가 두김씨가 만든 통일민주당에 뒤늦게 합류했다. 같은해 두김씨의 분열때는 김영삼측을 지지했고 3당 합당직전에는 구 민주당의 원내총무를 지내기도 했다.
3당 합당을 거부한 이 대표는 YS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합당을 반대하던 잔류파를 규합해 민주당을 창당,당총재를 맡았다.
91년 김대중총재가 이끌던 신민당과의 당대 당 통합을 이뤄 통합 민주당의 공동대표를 맡았고 지난해 12월 대선직후 DJ은퇴로 단일 대표로서 민주당을 이끌어왔다.
이 대표와 김 전 대표의 관계는 그리 친밀했던 것은 아니었다.
대선당시 DJ의 이 대표에 대한 후계약속도 처음에는 대선을 앞두고 영남지역 지구당 위원장들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대표는 자신이 우유부단하다는 주위의 평가에 대해 『중요한 순간에는 늘 어려운 결단을 거듭했고 한번도 어긋나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그만큼 순발력이 뛰어난 셈이다. 그러나 강한 고집에도 불구하고 뚝심이 부족하다는 평도 따라 다닌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당운영의 본격적인 책임을 맡은 만큼 고생하는 동지들에게 섭섭함을 주지는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부인 이경의씨(46)와 1남3녀.<황영식기자>황영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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