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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의 물증/박찬식(화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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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의 물증/박찬식(화요칼럼)

입력
1993.03.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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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파가 달린 물고기가 있다. 프로톱테루스 에티오피쿠스라는 학명이 붙어있는 이 폐어는 동부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탕가니카호에서 산다. 이 호수는 바이칼호 다음가는 세계에서 두번째 큰 호수로,넓이가 남한 전체면적의 3분의 1쯤 된다. 호수에는 4백여종의 생물이 사는데 그중 약 3백종이 이상한 생태계를 가진 희귀종이다. 건기와 우기의 구별이 심하고 아주 오랜 옛날 호수가 생길 때 다른 지역과 격리된채 지질변화가 진행됐기 때문이다.○인사파동의 뿌리

폐어는 길이 1m 정도의 큰 뱀장어처럼 징그럽게 생겼는데,건기가 되어 호수의 물이 줄어들면 호숫가 뻘속에 구덩이를 파고 고치같은 것을 만들어 그 속에서 허파로 숨쉬며 휴면하다가,우기에 물이 불어 구덩이에 닿으면 호수로 나와 아가미로 호흡하면서 본래의 생활로 돌아간다. 가뭄이 장기간 혹심하게 계속될 때는 4년동안이나 뻘속에 숨어 기다린 기록이 있다. 수억년간 진화를 멈춘채 살고 있는 화석과 같은 생물이다.

이 물고기의 생태를 오규원시인은 그의 시 「물증」에서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

「…물이 있으면 아가미로 숨쉬고/물이 마르면 폐로 숨을 쉬며/고생대 말기부터 오늘까지 살아/어느날 우리나라의 수족관에/그 모습을 불쑥 드러냈다/뻘속에서 4년쯤 너끈히 살아 견딘다는/프로톱테루스 에티오피쿠스여 뻘속에서/수십년 견디는 우리는/그렇다면 30억만년쯤 진화하지 않겠구나/깨끗하게 썩지도 못하겠구나」

30억년은 너무 절망적이지만,「김영삼정부」의 출범과 함께 벌어지고 있는 인사파동을 보자면 진흙탕속에서 살아온 지난 30년간의 썩은 군사문화를 걷어내는 일이 앞으로 1백년은 더 걸릴지 모른다는 암울한 생각에 빠지게 된다. 인사파동이 바로 그 부패의 「물증」이다.

「부끄러움을 아는데서 출발하는 도덕적 가치의 추구」를 문화의 일면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군사」와 「문화」는 처음부터 함께 섞일 수 없는 개념이다. 군대는 일체의 도덕적 가치로부터 해방된 집단이어야 한다. 적에 대한 살상과 파괴에 모든 능력과 수단을 집중하는데 군대의 존재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방어적 목적의 군대라 하더라도 그 본질은 마찬가지다.

○군사문화 부작용

전투가 벌어졌을 때 「불쌍하다」거나 「안됐다」거나 하는 윤리적 판단 때문에 군대가 적을 살상하기를 주저한다면 그 군대는 패배할 수 밖에 없고,그것은 그 군사조직의 소멸을 의미한다. 군대 안에서 상명하복의 엄정한 계급질서와 기강이 강조되는 것도 윤리적 가치 기준이 개입될 경우 조직 자체가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군인의 가장 큰 덕목은 상관의 명령에 대한 복종이며,군인에게 절대 허용될 수 없는 금기는 하극상인 것이다.

예의와 염치를 알아 평화가 이루어진 속에서 백성이 배부르고 등따습게 살 수 있는 곳을 만드는 일이 원시적 개념의 정치라고 한다면,정치야말로 가장 고도의 문화행위임에 틀림없다. 병들도 가난한 자의 슬픔을 위로하고,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다툼을 말려 고루 나누게 하며,지식과 힘과 생각이 다른 자들로부터 양보와 타협을 이끌어내 조화롭게 하고,파괴와 약탈을 막아 서로 신뢰하게 하는 일­자유민주국가의 정치인들이 해내야 할 이 모든 일들은 바로 윤리적 가치위에 성립하는 모든 문화행위의 궁극적 목표이기도 하다.

군인이 정치에 개입할 때 군과 정치와 문화가 함께 뒤틀리고 부패하는 것은 이처럼 상충하는 두개의 가치체계가 억지로 한 곳에 뒤섞이게 되기 때문이다. 군사통치로 멸망한 세계 모든 나라의 역사가 그 「물증」이다.

지금 새정부가 하려는 일은 썩은 진흙탕 같은 군사문화를 걷어내고 새물을 넣어 시민들이 자유롭게 숨쉬고 말할 수 있도록 사회를 맑게 하는 작업이다. 그 일 때문에 시민들은 그들의 용기있는 출발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개혁 주저말아야

어느 당의 대표는 얼마전 「대통령의 윤허」라는,왕정시대에나 쓰던 용어를 갑자기 꺼내 주위의 빈축을 사더니,당내 개혁이 시작되자 알듯 모를듯 한 소리로 혁신분위기를 흐리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하극상과 정권 찬탈로 군과 정치를 함께 왜곡시키고,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을 만든,30년전에 진화를 멈춘 군사문화의 화석이 개혁의 시대에 아직도 정계에 남아 이일저일 참견하고 있는 것부터 정리돼야 할 일일지 모른다.

시민들은 다만 부패의 뿌리를 제거하되 완급을 조절하는데 실패해 모처럼의 개혁 자체를 그르치게 되지 않을까 그것을 불안하게 보고 있다.<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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