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흥사단·YMCA 등/각종 단체활동 “20세기 산역사”/백수 눈앞 지난달 쓰러져우리나라에 최초로 정형외과학을 도입한 의학계의 태두이자 독립운동가,사회운동가로 한세기를 정열적으로 살아온 여천 이용설박사(98)가 백수를 눈앞에 두고 사경을 헤메고 있어 후학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졸수(90세)를 넘기고서도 자신이 이사장을 맡는 등 청춘을 바쳤던 여사단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내는 등 노익장을 과시했던 이 박사는 지난달 22일 노환으로 쓰러져 영동세브란스병원 7013호에 입원한후 혼수상태에 빠진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1895년 10월12일 평북 희천에서 태어난 이 박사의 삶의 여정은 세브란스병원장,여사단이사장,YMCA 이사장,2대 민의원 등 사회 각분야에 뚜렷한 족적을 남겨 주위에서 「20세기의 살아있는 역사」라고까지 불리고 있다.
12살때 평양으로 옮겨와 숭실중학에 입학,신학문을 접한 이 박사는 1915년 세브란스의전에 진학,의학도의 길에 들어섰다. 세브란스의전 재학중 YMCA학생회일을 하며 「하령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농촌 계몽 활동을 벌였다.
졸업반때인 기미년 3월,3·1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에 앞장서고 「독립신문」이란 유인물을 병원숙소에서 만들어 돌리던 이 박사는 4월중순께 이를 눈치챈 일경의 수사망을 피해 북경으로 망명했다.
이 박사는 북경협화대학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다 도산 안창호선생을 만나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도산을 따라 도미,여사단일을 하며 24년부터 2년간 미 노스웨스턴대 의대에서 정형외과학을 전공한뒤 26년 귀국,세브란스 의전교수직을 맡았다.
이 박사는 당시 「경성의전에는 백인제(백병원설립자),세브란스에는 이용설」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명의로 이름을 날렸다.
36년 「1백5인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기도한 이 박사는 광복직후 미 군정 아래서 초대 보건후생부장(현 보사부장관)을 맡았고 지난 50년에는 동료들의 추천으로 인천에서 민의원에 출마,당선됐다.
그러나 중상모략이 판치는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55년 다시 학교로 돌아와 6년간 세브란스병원장을 지냈으며 48년부터 74년까지는 6차례나 여사단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이 박사는 슬하에 미국 뉴저지주에 살고있는 흉곽외과 의사인 외아들 근영씨(70)와 3녀를 두고 있다. 이 박사의 병실은 막내딸 정실씨(64) 등이 외롭게 지키고 있다.<이진동기자>이진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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