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손자」 고국서 막노동 “전전”/작년 7월 귀국… 월 10만원 셋방/중국적 유지… 연금혜택도 없어김좌진장군과 함께 청산리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고 후에 만주 일원의 통합 독립군 조직인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를 지낸 백포 서일장군(본명 서기학·1881∼1921)의 장손 일가가 90년 중국에서 영주귀국했으나 보훈은 커녕 한국 국적조차 얻지 못한채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2동 156의 190 달동내 재개발지역의 3평 남짓한 단칸 사글셋방에서 부인,남매와 함께 살고 있는 서경섭씨(67)는 한때 만주 일대에서 일제 관동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서일장군의 장손.
1921년 당시 북만주 밀산현에 근거를 두고 있던 대한독립군단이 중국 적군의 후원을 받아 토비 수백명의 야간기습(흑하사변)으로 거의 떼죽음당한 것을 비관해 서일장군이 자결하자 외아들 윤제씨는 주위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아버지의 고향인 함북 경원군 안농면으로 돌아와 경섭씨를 낳았다.
경섭씨는 그후 아버지를 따라 흑룡강성에 정착,발해소학교를 졸업한뒤 공장공원으로 일하며 2남4녀를 둔채 평범하게 살아왔다.
그러나 문화혁명기간인 1969년 흑하사변 당시 혼자 살아 남았다는 이유로 일제간첩 누명을 쓰고 아버지는 고문을 당한 끝에 숨지고 말았다.
타향살이를 청산키로 마음먹은 서씨가 조국땅에 첫발을 디딘 것은 90년 9월. 경남 진해에 사는 처이모 박모씨의 초청으로 관광비자를 발급받아 석달간 한국에 머물렀다.
조국의 발전상에 귀국 결심을 굳힌 서씨는 비자 만기로 돌아갔다가 서일장군이 신봉했던 대종교 관계자와 광복회,퇴역장군 박영준씨(78) 등의 도움으로 지난해 7월 아직 출가하지 않은 차남 항우씨(26) 막내딸 종란씨(28) 및 부인 문미야씨(57) 등과 함께 영주귀국했다.
그러나 서씨 일가가 고국에서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 월 10만원짜리 사글셋방이 전부였다.
서씨는 주위의 도움으로 법무부와 외무부로 부터 국적취득허가와 영주귀국허가를 받았고 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 후예임을 인정받은 상태다. 그러나 아직 단 한푼도 보훈연금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중국 흑룡강성에 남아있는 장남과 세딸 가족에게 악영향을 미칠까봐 서씨가 중국국적 말소조치를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어르신의 큰뜻을 몇푼의 보상을 바라서 떠벌려 훼손하고 싶지는 않다』는 서씨의 눈가에는 「장군의 손자」로서의 자긍심으로도 감추지 못하는 비애가 서려있었다.<김관명기자>김관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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