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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변호사 출신/김상철 서울시장/“책임자부터 부패 척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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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변호사 출신/김상철 서울시장/“책임자부터 부패 척결”

입력
1993.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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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배달… 서울법대 수석/80년대 시국사건등 변론80년대 인권변호사로 유명했던 김상철변호사(46)가 1천만 서울시민의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제26대 시장에 임명됐다.

그는 용산중 재학시절 자타가인정한 수재였지만 5·16군사쿠데타 이후 고교입시에 체력검사점수가 새로 반영되는 바람에 뜻밖의 고배를 마셨다. 신문배달을 하며 이듬해 서울고에 진학,줄곧 수석을 다투면서 서울대법대에 들어갔다.

김 시장은 20년간 판사와 변호사로 활동해온 법조인이지만 대학시절부터 「새로운 정치」를 꿈꾸며 사회개혁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왔다, 「농촌법학회」 「경제복지회」 등 각종 서클활동에 적극 참여했고 혼자 전국을 무전여행하며 어려운 농촌현실을 체험하기도 했다.

또 한비밀수사건 규탄데모·3선개헌반대 시위에 앞장서는 등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해 법대를 수석 졸업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서울대 수석졸업자들을 오찬에 초대한 자리에서 겁도없이 『학생들이 불의에 저항하는 것은 나라와 겨레의 장래를 위해 다행스런 일이다. 정부는 학생들에 대한 강경조치를 발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건의한 일도있다. 이 때문에 임기 1년이 남았던 이한기 법대학장이 도중하차하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했다.

졸업 이듬해인 71년 1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한 김 시장은 73년 9월 서울형사지법 합의부로 발령받았다. 이때 처음 맞닥뜨린 사건이 박형규목사가 관련된 「부활절 남산야외음악당 사건」.

유신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기에 그는 박 목사에게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하고 이틀뒤 보석으로 석방했다.

80년말 변호사를 개업한 뒤에는 홍성우·황인철(작고) 등 선배 인권변호사들의 권유로 85년 4월 대우자동차 파업사건을 수임하면서 인권변호사의 길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후 김근태씨 고문사건 미 문화원 방화사건 권인숙씨 성고문사건 등 각종 시국사건 변론에 참여했고 이 과정에서 김영삼대통령과 남다른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3대총선 무렵에는 평민·민주 두 야당으로부터 영입제의를 받았으나 『6·10항쟁을 통해 국민들이 만들어준 민주화의 호기를 기존 야당이 독선과 아집에 빠져 놓쳐버렸다』고 분개,새 정치의 기치를 내걸고 우리 정의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강남갑구에서 겨우 2천7백20표로 7명의 후보중 6위를 기록하는 좌절을 맛보았다.

이때부터 노선을 수정하기 시작한 그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서 자진탈퇴한 뒤 다분히 친정부적이고 보수적인 글을 발표하며 관변기관 활동에도 적극 참여해 화제가 돼왔다.

김 시장은 취임식후 기자들과 만나 『책임자부터 모범을 보이고 똑바로 한다는 것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부패척결 복안을 밝히고 시정운용 방향에 대해서는 『새로운 정책을 입안하기보다 전임시장이 세워놓은 정책의 실천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김 시장은 이어 『94년이 정도 6백년이 되는 시점이므로 서울을 세계적으로 성숙한 문화도시로 만들어 나가는데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김 시장은 행정경험이 없는 점에 관한 질문에는 『노련하고 사명감 있는 시공무원들의 도움이 절실하다』며 『일선 행정책임자들의 조언을 귀담아 듣겠다』는 대답을 했다.<고재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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