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옥고… 생계돕기 채소장사도 /“소외계층의 눈물 닦아주고 싶다”재야인사에서 청와대 사회문화수석비서관으로 변신한 김정남씨(51)는 『소외된 사람들의 눈물을 닦고 그늘진 곳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청와대의 귀가 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전병민씨의 정책수석사퇴 파문으로 특히 관심을 모은 김씨는 24일 내정발표 직후 민자당 기자실을 방문,기자들의 질문에 절제된 언어로 진지하게 답했다.
소감은.
『재야에 몸담아오다 제도권의 국정운영에 참여하게돼 감개무량하다. 우리사회의 그늘진 곳을 밝히는데 최선을 디하겠다』
기용된 배경은.
『재야도 책임있는 성원으로 국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김영삼 새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본다』
소외계층을 위한 복안은.
『소외된 사람들의 고통과 한을 국정에 반영할 수 있도록 청와대의 귀가 되겠다. 아직 정확한 지침을 시달받지는 못했지만 차차 업무파악을 하면서 대안들을 만들어 나갈 생각이다』
지난 대선때 역할은.
『신한국창조를 위한 시민연합(신한연)을 결성,김 당시 후보의 연설과 정책에 재야의견을 전달했다. 신한련은 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재야인사들이 모여 만들었다』
재야의 전체적 분위기와는 달리 YS지지를 선택한 이유는.
『솔직히 말해 그의 인간성에 매료됐다. 민주화가 어느정도 틀을 잡아가고 있는 지금 누구를 선택할지는 전적으로 자신의 문제다』
넥타이를 매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
『집안에 큰 일이 있을 때만 맨다. 모두 3∼4번 정도다』(이날 김 내정자는 넥타이를 맨 정장차림이었다)
김 내정자는 젊은 대학생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운위되는 6·3세대의 대표적 인물. 그는 61년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후 진보성향의 문리대학보 「새세대」 기자로 활동했고 이후 64년 반일 학생운동을 현승일(국민대총장) 김도현(민자당 성동을 지구당위원장) 김종태씨 등과 함께 주도했다.
이로 인해 그는 6·사태의 주동자로 몰려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다. 그는 선고유예로 풀려나긴 했지만 「빨간딱지」 때문에 취직을 하지못해 언론계·학계·정계로 진출한 친우들과 다른 길을 걷게 됐다.
재야 운동에 나선 그는 68년 서울사대 독서회사건 등 각종 시국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3년간의 수배생활을 했다. 수배시절 1년선배인 신홍범씨(두레출판사 사장) 집에 숨어살다 신씨의 누이동생과 사귀어 수배중에 결혼했다.
생계때문에 채소장사·출판사근무중 온갖 일을 해본 김 내정자는 71년 검거돼 6개월간의 징역생활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73년) 민청학련사건(74년)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결성(〃) 그리고 5공시절의 보도지침사건·박종철군 치사사건 등에서 많은 역할을 했다.
그는 재야운동을 하면서도 전면에 드러나지 않아 「얼굴없는 운동가」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는 유신후인 74년 야당과 재야를 연계시키기 위해 김 새 대통령(당시 신민당 총재)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20년 친분」을 맺어왔다. 『씨뿌린 자가 열매를 따는 것이 역사의 정의』라고 말해온 그가 「YS열매따기」에 어떤 기여를 할지 주목된다. 등산이 유일한 취미,부인 심춘자씨(49)와 딸 넷.<이영성기자>이영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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