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대 야당의 지도체제는 당시 당내 파벌·세력형편에 따라 달라져왔다. 즉 한파가 다수 세력이 됐을 때는 단일지도체제를 비롯,비슷한 세력들이 정립했을 때는 틀림없이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했다. ◆야당 사상 최초의 집단지도체제는 1950년대 민주당이 도입,성공적으로 운영됐다. 신구파가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최고위원으로 구파의 조병옥 백남훈,신파의 장면 곽상훈을 선출하고 대표최고위원에는 구파 성향이 짙지만 원만한 성품의 신익희를 추대했던 것. 신씨가 서거한뒤에는 조병옥이 뒤를 잇고 최고위원에는 김도연 박순천 윤보선 등이 선임됐다. ◆집단체제의 두번째 실험은 5·16쿠데타군정후 정치활동의 재개로 구 정치세력이 결집했던 민정당서 이뤄졌다. 대표최고위원에 김병로,최고위원은 김도연 백남훈 이인 전진한 서연귀가 맡았고 얼마뒤 윤보선이 가세했던 것. 세번째는 신민당이 지도체제를 단일서 집단으로 바꾼 76년 9월 전당대회서 채택됐다. 이철승이 대표최고위원,고흥문 김재광 이충환 신도환 유치송이 최고위원이었다. ◆사상 네번째인 현 민주당의 집단체제는 구 신민·구 민주의 합당에 따른 안배의 산물. 그러나 6대 4의 원칙으로 당직을 나누다 보니 전당대회 대의원이 6천여명,최고결정기관인 당무위 위원이 60명,최고위원이 대표까지 포함 9명이 되는 등 자리만 마구잡이로 늘렸다. 겉으로 보면 각 기구에 많은 사람이 참여하여 매우 민주적인 것 같지만 실효면에서는 지극히 비민주적이고 최고위원·당무위원의 권위만 폭락시키고 말았다. ◆특히 최근 전당대회 준비위가 당원들의 의견에 따라 최고위원수를 5∼6명으로 줄이기로 했음에도 출마자들이 이를 뒤엎은 것은 한심한 일이다. 전세계 어느 민주정당도 9명의 최고위원이 임립,운영하는 예는 없다. 전당대회후 9개의 계파가 사사건건 맞서 내분으로 지샐 것을 생각하면 어이가 없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