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92 대선때 아이디어맨으로 주목/고졸의 「능력과 변신」 두얼굴에 관심김영삼 차기 대통령이 선정한 청와대 비서실 진용중 의외의 인물은 단연 전병민 정책수석 내정자(47)이다. 「베일속의 측근」 「기획의 귀재」 등 별칭조차도 의외성을 물씬 풍기고 있다.
특히 전씨는 후보경선,대통령선거 등 고비고비마다 김 차기 대통령에게 결정적인 「비책」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향후 그의 일상과 역할이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다. 또한 그는 김 차기 대통령의 차남인 현철씨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많은 풍설까지 양산하고 있다.
청와대 비서진 발표(17일)때 세인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 대목은 불확실한 학력과 경력. 더욱이 신임 수석들이 발표직후 민자당으로 나와 소감과 포부를 밝혔으나 전씨만은 기자들의 전화취재마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아 의외성을 증폭시켰다.
전씨는 당안팎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흐르자 18일 하오 1시40분께 당기자실로 찾아와 개략적으로 「지난 시절」을 밝혔다. 그러나 그는 이 미니회견에서도 하오 2시의 신임 수석비서관 회의를 이유로 충분한 일문일답없이 화급히 자리를 떠 개운찮은 뒷맛을 남겼다.
불과 이틀사이에 드러난 그의 행적,검증되지 않은 경력 등으로 그의 자격문제는 어떤 형태로든 걸려져야 한다는게 당내의 대체적 의견이다. 박관용 비서실장도 이날 『청와대 비서진의 직급조정은 필요할 것』이라고 말해 정책수석에 대한 재검토를 시사했다. 일각에서는 『차관급보다는 1∼2급 상당의 정책비서관이 더 적절할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전씨가 이날 밝힌 연대기별 이력은 잦은 변신의 기록이라 할 정도다. 주요 경력은 ▲66년 홍성고 졸업 ▲66∼68년 맏형 병석씨가 설립한 문예출판사 근무 ▲68∼72년 군복무(1사단) ▲72∼78년 중정산하 북한문제연구소의 잡지 「북한」지 편집장 ▲78∼80년 일본 동경대 부설 신문연구소 수료 ▲80∼87년 현대사회연구소 기획실장겸 「2000년」 편집장 ▲87년 한가람기획(노태우후보 지원연구소) ▲88∼90년 한국정책연구원(한가람기획의 후신) 근무 ▲90년 6월∼93년 1월 임팩트코리아 기획실장 등이다.
그는 『80년 일본에서 귀국한뒤 사회정화위에 잠시 근무하다 현대사회연구소 창설에 간여했다』며 『이후 현사연이 법인으로 등록된후 기획실장이 됐다』고 말했다. 현사연을 떠난 때는 87년 6·29선언직후. 그는 이 대목에 대해서 『당시 소장이던 이영호씨(전 체육부장관)가 노태우 민정 후보를 도우라고 주선해주었고 또 연구원들이 연구원의 기능변경을 요구해 떠났다』고 말했다.
전씨는 이어 기능변경 요구가 현사연의 정권홍보 중지요구임을 확인했고 『약간의 경리사고도 있었다』고 부연했다. 경리사고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그는 밝히지 않았지만 당시 현사연에 근무했던 사람들은 공금 유용시비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절 그는 정계 학계 등 각 분야의 주요 인사들과 교분을 두터이했다는 후문이다.
그가 정치기획의 귀재로 부상한 결정적 계기는 87년 대선때 노 후보의 외곽 홍보팀 「한가람기획단」을 맡으면서이다. 「원탁참모회의」 「Y셔츠 차림의 대통령」 등이 모두 전씨의 아이디어라는 얘기도 있다.
그가 김 차기 대통령과 연을 맺게 된 것은 90년 4월 알고 지내던 현철씨 소개로 인사를 하면서부터. 이후 그는 뛰어난 판단력으로 내각제 파동,민정계 의원의 탈당,후보경선 등 중대고비 때 「정면돌파론」 등을 제공,김 차기 대통령이 위기를 극복하는데 일조를 했다고 한다.
이미 87년 대선때 타의 주종을 불허하는 「페이퍼 웍크(Paper Work)의 일인자」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여서 그의 비중은 점차 커져갔다. 그는 90년 6월 「임팩트코리아」를 창설,각종 아이디어를 창출했다.
전씨는 「임팩트코리아」의 기능에 대해 『김 차기 대통령의 지시로 지난해 6월부터 12월까지 당선후를 준비해왔다』고 말했다. 그러난 그는 『임팩트코리아가 조각의 기초자료를 준비했다』는 항간의 설에 대해선 『아니다』고 완강히 부인했다.
전씨는 발탁배경을 묻는 질문에 『추측이지만 학력사회의 풍토속에서 능력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배려측면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황급히 회견장을 떠나는 그의 뒷모습에는 「능력과 변신」이라는 이미지가 짙게 남아 있었다.<이영성기자>이영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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