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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형만큼 속알맹이도(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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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형만큼 속알맹이도(사설)

입력
1993.0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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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 종교전문지는 세계 50대 교회에 한국의 교회가 23곳이나 들었다는 기록을 발표했다. 그중에는 60만명이나 되는 신도를 포용함으로써 명실공히 세계 1위의 단일교회로 당당히 선정된 교회도 있다. 우리 스스로도 놀랄만한 성장이고 종교적 축복이다.우리나라의 종교열은 진작부터 세계에서 「알아주는」 수준이다. 각종 종교의 신도와 교회와 사찰이 거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곁들여 우리 사회엔 지나칠이 만큼 물량주의가 팽배하다. 우리 곁에 「최고·최대」들이 늘어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성장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므로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문제는 내실과 실속 보다는 외화와 규모만을 좇는 경향이 없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 초대형 교회가 많다고 하는 이러한 현상은 폭발적인 종교열 탓인가,물량주의 사고가 원인인가,아니면 단순한 우연일까,어떻든 착잡한 심경을 숨길 수가 없다. 근래에 와서 한국의 종교는 과당 물량주의에 탐닉한 경향이 노골화되었고 외형의 성장발전에 치중한게 엄연한 사실이자 현실이기도 하다. 개척교회의 활동도 활발하나 거대교회를 목표로 삼는 것을 목회의 성공으로 선망하는 시각이 있음을 부인 못한다. 그런데 대교회의 바탕을 기복주의와 개교회주의에 두고 있음은 그냥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대교회 현상을 무조건 비판적으로만 바라볼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 역기능이 무엇인가는 깊은 성찰이 따라야 할 것이다.

오늘의 물량주의 종교와 교회는 외형에 못따르게 윤리의 응집력은 오히려 쇠퇴해 가고 있음이 역력하다. 신앙집단인 종교는 도덕성과 사회적 책임을 망각해서는 그 존립의 터전이 흔들린다. 한국의 교회는 이러한 기능을 소홀히 다루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자주 생기게 하고 있다. 사회전반이 이른바 「총체적 부정」으로 좌초하고 있는 현실에 그저 무관한듯 침묵하며 초연하게 교세 확장에 골몰함은 결코 신앙과 종교의 본질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책임을 오로지 세속사회에 고스란히 넘긴다는 것은 종교인들이 사명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순수한 신앙 기능과 사회적인 기능이 유별함을 익히 알고 있다. 종교집단이나 교회는 이 두가지를 조화있게 발휘해야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음도 또한 간과해선 안된다.

거대화를 이룩한 한국의 교회는 이제 양에서 질이라는 변증법적인 발전을 도모할 단계에 이르렀다. 기복신앙과 개교회주의를 과감히 초탈할 때,대교회의 역동적인 활로가 열리리라고 믿는다. 안주하는 신앙생활보다 움직이는 신앙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교회의 변화를 바라는 것은 결코 신도들의 뜻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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