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왕국 일본 “부정은 법대로”/경찰국세청 비리조사위해 인사교류/「검은돈」 추적… 가차없는 처벌/40년 교사 “돈봉투 받은 경험없다”/직업의식 투철… 부조리 발 못붙여【동경=문창재특파원】 지난 3일 동경의 번화가 시부야(삽곡). 콩을 뿌려 귀신을 쫓는다는 「절분」인 이날 시민단체들은 다케시타(죽하등) 전 총리와 오자와(소택일랑) 전 자민당 간사장의 의원직 사퇴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사가와규빈(좌천급편) 사건으로 일본 정계의 대부 가네마루(김환신) 전 자민당 부총재가 물러났고 최대 파벌인 다케시타파도 분열돼 어느정도 열기는 식었지만 국민들은 이렇듯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있다.
주부들은 의원직 사퇴요구 서명대를 만들어 서명을 받았으며 이들의 얼굴을 귀신처럼 그린 팸플릿을 제작,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죄송합니다』라고 머리를 숙이면 적당히 넘어가곤 하던 일본에서도 이제 「좋은 시대」는 끝난듯이 보인다.
일본을 흔히 「행정지도 왕국」이라고 부른다. 특별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없어도 관청의 각종 지시나 내부규정이 잘 먹혀들기 때문이다.
바꿔말하면 정부와 기업,국민들 사이에 신뢰관계가 형성돼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국민을 위해 일하고 국민은 정부의 지시를 잘 따르는 것이 이익이라고 느낄 때만 이같은 관계가 가능하다.
지난해 7월말 지바(천엽)현 후나바시(선교)시의 한 빠찡꼬업자가 탈세한 돈으로 남태평양의 바누아투공화국의 리조트호텔 건설 등에 투자한 사실이 적발돼 약 2억엔의 벌금을 추징당하고 검찰에 고발됐다.
그런데 얼마후 바누아투공화국 총리의 명의로된 공문서가 동경 국세국 사찰부장 앞으로 날아왔다. 『빠찡꼬업자는 우리나라에 막대한 공헌을 했다. 관대한 배려를 바란다』는 내용의 「감형 탄원서」였다.
국세당국은 깜짝 놀랐지만 결정을 바꿀 수는 없었다. 일본의 국제화,양국간 우호관계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법은 법이다』라는 결론이었다.
세금문제 만큼 정부와 국민이 대립하는 분야도 드물다. 정부는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세금을 거두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숨겨진 「검은 돈」을 정확히 찾아내야 한다.
지난해 7월 일본 국세청은 경찰 수사관 2명을 국세조사관으로 발령했다.
세무조사의 현장에 경찰관이 직접 투입되는 일은 처음이었다. 경찰청과 국세청의 이같은 상호 인사교류는 바로 「검은 돈」 추적때문이다.
검은 돈은 폭력단과 관계가 깊다. 지난해 3월 「폭력단 신법」이 시행된 이후 경찰은 폭력단의 자금원을 철저히 파헤치지 않고서는 폭력단을 근절하기 어렵다는 점을 깨달았다. 경찰은 폭력단의 합법,비합법적인 수입을 모두 합쳐 연간 총액이 1조3천억엔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세청에 파견된 경찰들은 자본금 1억엔 이상의 대기업에 대해 임의로 세무조사를 실시할 수 있는 조사부에 배속됐다. 근무기한은 2년.
국세청과 경찰청간의 인사교류는 지난 65년부터 시작됐다. 경찰청은 국세직원의 양성기관인 세무대학에 매년 몇명씩을 특별연수생으로 파견해오고 있다. 그럼에도 이번 인사가 주목을 받는 것은 국세청과 경찰청간의 정보교환이 보다 빈번해졌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과세 통보제도가 있다. 경찰 등이 다른 사건으로 조사를 하던중 「탈세의혹이 있다」고 판단되는 자료가 발견되면 즉시 세무당국에 통고하는 제도이다. 많은 나라에 있는 이 제도를 더욱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인사교류의 한목적이다.
「경제대국」 일본을 뒷받침하고 있는 또 다른 것은 교육이다.
아사히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주간지 「아에라」는 지난해 8월4일자에 보기드문 기사를 크게 실었다.
고교입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내신에 부정이 있다는 교육부조리 고발기사였다. 교사들이 내신성적을 바꿔치기 식으로 조작하고 있으며 이같은 부정은 광범위하게 만연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봐도 당연히 「감초」격으로 거론될법한 「돈」문제는 없다. 교사들이 좀더 많은 학생을 합격시키기 위해 아주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나 실업계 진학학생들의 점수를 약간 부족한 학생들과 바꿔쳤다는 내용이다.
『처음에는 무척 놀랐습니다. 하숙집 아주머니가 국민학생인 아들 때문에 「때」만 되면 걱정하더군요』 지난 89년부터 1년여동안 서울에 유학했던 세키네 히로코씨(관근홍자·35)는 일본에는 교육현장에서의 돈봉투 문제가 전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일본인 만큼 선물을 좋아하는 국민도 드물다. 「선물의 일상화」라는 표현 그대로다. 그러다보니 정도가 지나치는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교육계로 범위를 좁히면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는 「부조리」가 없다.
올해 67세인 세키네 하츠에씨(관근초강)는 40여년동안 국민학교 여교사로 재직하다 은퇴했다.
그는 『조그만 선물은 받아 보았지만 돈봉투는 한번도 없었다. 나뿐 아니고 모두 그랬을 것으로 확신한다』며 「돈봉투」 질문 자체에 대해 의아해 했다.
일본에서 자녀 등을 학교에 보내고 있는 한국인들은 모두 한결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 어떤 불이익을 당하지나 않을까』하는 불안감에서 「성의표시」를 했다가 무안을 당한 경우가 종종 있다.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무척 당황했습니다. 일본말이 서툰 아이들을 위해 선생님이 일부러 개별지도까지 해주셨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다가는 큰망신을 당한다는 이야기는 들었기 때문에 「오봉」(추석) 때 돈이 아닌 조그만 지갑을 선물했습니다. 그랬더니 당장 고맙지만 신경을 안써도 된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일본에 근무하는 남편을 따라와 국민학교 5학년,3학년생을 일본학교에 보내고 있는 김주희씨(40)의 말이다. 교사들의 가정방문은 일년에 1∼3차례 정도 반드시 있다. 그런데 학생집에서 내놓는 것은 차 뿐이다. 과일조차 준비안하는 것이 오랜 불문율이다.
돈봉투는 없지만 그렇다고 「촌지」가 전혀없는 것은 아니다. 오봉과 연말,학기초 등에는 선물을 한다. 하지만 그 선물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통용되는 수준이고 공개적이어서 말 그대로 「조그만 성의표시」 정도다. 내용은 대개 식용유·국수·맥주 등으로 3천엔을 넘지 않는 선이다.
이같은 현상은 여러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대사관의 김종만교육관은 『패전의 충격에서 기본적으로 일본사회에 잘못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로부터 가정과 학교의 운영방식에 개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세키네씨는 획일성이 강조되고 돋보이는 사람은 주위에서 미움을 받는 일본사회 풍토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다.
하지만 더 기본적인 배경은 사회분위기다. 일본거주 4년째인 유태영씨(35·회사원)는 『운동회 전날 흰색 반팔셔츠를 입고 오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마침 비도 오고 날씨가 추워져 긴팔을 입혀 보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긴팔을 입은 학생은 우리 아이 뿐이었습니다』며 『자기 아이만 특별대우를 해달라는 생각이 일본 학부모들에게는 아예 없는 것 같다』고 풀이했다.
일본인들의 특징중 하나인 투철한 직업의식도 이러한 깨끗한 사회만들기에 한몫 거들고 있다. 특히 교사의 경우 명예를 소중히 여겨 부조리 등의 「소문」이 나면 도저히 버텨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이 최근 세계 각국으로부터 비난받은 것중의 하나가 「공통적인 공정한 룰」이 결여돼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내부에서만은 공정성을 유지하고 있으며,이것이 정경유착형의 각종 스캔들 속에서도 일본사회를 지탱해줄 뿐 아니라 변혁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일본에 온 한국인들은 처음에는 이러한 분위기에 오히려 불안감을 느끼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한 것으로 느낀다.
또 이같은 부조리 습관에 젖어있던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인 학부모 등의 실토는 「부패일소」 등 요란한 구호나 운동보다도 모두가 직접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함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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