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세로 천수를 다한 한 노여교수의 유지에 따라 시신은 의과대학생들의 해부실습용으로 기증되고 그중에도 안구는 살아있는 두사람에게 광명을 찾아주게 하는데 쓰였다고 한다(31일자 한국일보 23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하는 뉴스다.같은 지면엔 한 소년의 자살사건도 크게 보도되었다. 제자를 체벌한 죄책감으로 고민하다 자살했던 여교사의 아들인 고교 1년생이 그 1백여일뒤 「엄마따라」 아파트서 몸을 던져 죽었다는 내용이다. 보는 사람을 연민에 젖게 만드는 뉴스라고 하겠다.
이 두가지 죽음은 한 지면에 보도되었지만 서로 다른 생명관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노여교수의 경우는 그 죽음이 담담하고 고결하다. 살신성인 또는 사생취의같은 거창한 표현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일회적일 뿐인 생명력을 어떻게 가치있게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과 대답을 동시에 준다.
소년의 경우는 그가 아직 어린 나이이기에 그 죽음이 안타깝다. 그리고 그 책임이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어른들의 것임을 깨닫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세상의 관심 바깥으로 내던져진듯이 보이는 생명관의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 사회 도처에 반생명적 현상들이 만연하고 있음에도 그 심각성을 알려고 들지 않고 있으며,우리 사회만이 아니라 범지구적으로도 미증유의 「생명위기」의 연대로 인식되고 있음에도 그 절박한 현실을 우리가 외면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 소년의 자살을 두고 보더라도,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한해동안 감행되는 1백50만건의 「태아살해」와 그것이 상징하는 일상적인 반생명성에 전혀 관계되지 않는 일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국민학교 취학어린이의 남녀 성비가 100대 91.8(92년도)로 나타난 불법적이고 자연 역행적인 태아감별의 성행은 또 어떤 불길한 결과를 미래의 우리 사회에 초래하고 있는 것인가를 숙고해야 한다. 엊그제 한 대학병원의 불임클리닉에서 폭로된 마구잡이식 인공수정의 가공할 현실 역시 우리 사회에 무수하게 널린 반생명적 행태의 일단을 보여준 작은 예에 불과하다. 세계 최고율의 교통사고 사망자,성폭행,인신매매,기아,마약 등 이런 모든 범죄적 현실이 생명 경시의 세상풍조와 직접 연계되어 있음을 우리는 새삼 깨달아야 한다.
생명은 분자생물학이나 생명과학의 영역으로서 설명되는 현상이라기 보다는 그러한 기계론적인 과학탐구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초합리적인 것이며,신비스러운 무엇이라는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연순환계의 일부로서 자연생태계와 서로 주고받고 의지하는 연대공동체로서의 인간생명관도,특히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요구된다.
생명은 역동적인 것이며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반생명성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성찰이 촉발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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