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당선자의 대통령취임식을 한달 앞둔 날에 김대중낙선자는 장기간의 외유에 나선다. 지난 한달 남짓한 동안에 김 차기대통령은 집권준비로 겨를이 없었고 정계를 물러난 김씨는 은퇴준비로 바빴다. 분주불가이기는 로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으나,그 밀도는 전혀 다른 것이다.한쪽은 선거에서의 승자로서 권력을 손아귀에 넣은 당당한 처지이고 한쪽은 선거에서의 패자로서 권력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는 처지이다. 더구나 패자는 패배 승복의 순간에 정계은퇴까지를 결행해 버렸다. 지난 한달동안 패자가 바쁠 수 있었던 것은 장기외유에 앞서 주선된 전별의 모임들에 참석하는 일 때문이다. 그 모임들은 전의를 부추기거나 축의가 난만한 여느 다른 모임들과는 분위기가 딴판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승패 명암교차
어차피 승자독식(Winner takes all)은 민주제도의 독특한 원칙 가운데 하나이다. 승자의 임기동안만은 권력은 승자의 것이다. 김 차기대통령이 집권준비에 골몰하는 사이 김대중씨가 외국의 대학촌을 찾아 떠나가는 장면은 그러나 명암의 교차가 강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양이 쓸쓸하기 때문이다.
김씨에게는 이번이 세번째 장기외유 길이다. 그 세번이 거의 10년 간격인 것은 공교롭다. 72년 유신선포 직전에 나갔다가 10달만에 납치돼 돌아온 것이 첫번째,82년 신 군부에 의해 사형선고까지 갔다가 풀려난 뒤 미국으로 망명했던 것이 두번째,그리고 대선 패배후 「은퇴」의 길로 선택된 93년 1월의 이번 외유가 세번째인 것이다. 다만 유럽으로 선택된 이번 외유는 먼저번 두차례의 경우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특징이 있다.
지난 대선의 개표가 윤곽을 드러내고 있던 12월19일 아침 김씨는 「…저는 또다시 국민 여러분의 신임을 얻는데 실패했습니다」로 시작되는 패배승복정계은퇴 성명을 읽었다. 그야말로 깨끗한 태도였다. 그날 국내 언론들은 일제히 그를 「칭송」해 마지 않았다.
김씨 자신은 뒷날 대선 패배의 원인분석을 통해 색깔론지역성중산층 보수화일부 언론의 자세를 꼽았는데 그의 은퇴에 대한 예찬은 어떤 언론도 비슷했다는 점을 기억할만 하다.
○국민칭송의 진의
문제는 그의 은퇴를 보는 시각과 은퇴에 얹는 세상의 바람이 아직도 착종되어 있다는 것이다. 언론들의 「칭송일변도」에도 실은 그러한 저류가 깔려있음을 숨길 수 없다. 그는 과연 거인다운 용기를 보였고 그 용기를 실행하기 위해 먼길 떠나기를 마지않는 것이지만 그가 스스로 한 부분이 되어 떠메고 걸어온 한국 정치사에 얽힌 기반에서 그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밑바닥 생각의 큰 줄기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복선」을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10년만에 돌아올 수 있었던 드골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더러는 「앞으로의 정국과의 함수」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 모든 생각과 추측들은 그러나 오늘 이루어지는 출국의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기 십상이다. 적어도 현재까지의 진실은 아니다. 그는 우선 쉬고 싶고,안팎의 관심과 추적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뜻의 말을 한 일이 있다. 그것이 진실의 전부일 가능성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떠남으로써 이 땅에 남는 문제들이다. 떠나는 본인도 마음의 밑바닥에 결코 떼어 낼 수 없는 과제가 있다. 『도청앞 분수대에 막걸리를 가득 채워』 경축할 수 있는 「해한의 그날」을 언제 누가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 그 하나이다. 그 기약이 사라졌기에 더욱 절실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김대중선생님에게 매달렸던 의식구조를 과감하게 털어버리는』 과제다. 이른바 「탈DJ」이다. 대선 이후 호남지역 신문들이 벌이는 「새 호남」 「인재양성」 등의 캠페인이 말해주는 각성이 그것이다.
이 두가지 과제는 서로 상반하는듯 하지만 결국 한가지이다. 그리고 이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은 지금 김대중시에게는 없다. 그렇다고 누군가 자조하듯이 20년후 30년후를 기약하자는,그런 어처구니 없는 문제가 되어서도 안된다.
결국 이들 과제는 차기 대통령의 것이다. 권력이란 어차피 강제력이 아니라 「설득하는 힘」일 뿐이다. 김씨가 남겨둔 과제들을 일거에 해결할 방도는 아무 데도 없지만,권력을 가진 대통령으로서 최선을 다할 수는 있다. 그 최선의 설득이 호남출신 인사를 국무총리로 임명하겠다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총리가 호남출신인 사실이 호남의 아픔을 달래는 방법은 전혀 아니다.
○만나서 화합을
차기 대통령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의 하나는 떠나는 김씨를 찾아가 만나는 것이다. 김씨가 정계은퇴로써 「역사에의 승부」를 걸고 있음과 똑같이,차기대통령 역시 화해와 화합의 정치로 「신 한국에의 승부」를 걸어야 한다. 아직 시간이 있다. 체면이 무슨 상관인가.<본사 주필>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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