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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국」의 문화의식/김성우(문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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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국」의 문화의식/김성우(문화칼럼)

입력
1993.0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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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에서는 흑인 여류시인인 마야 안젤루가 자작 축시를 낭송하는 것이 이채로웠다. 1961년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 때 당시의 국민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축시를 읽은 이래 처음이라해서 화제다. 안젤루는 『30여년전 프로스트의 낭송을 들었을 때 전율했다』고 회상하고 『시인의 목소리로 미국의 결속을 전파하는 것이 영광스럽다』고 말했다.취임식에서는 오페라 가수 마릴린 혼이 축가를 불렀고 취임 전야의 축하공연에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마이클 잭슨 등 슈퍼스타들이 출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이 색소폰을 연주하는 음악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음악전문 TV에 나와 젊은세대를 끌어들임으로써 선거에 이겼다는 분석이 나오기까지 한다. 미국의 팝음악계는 엘비스 프레슬리,주디 콜린스 등을 좋아하는 대통령이 불러일으킬 새 바람에 거는 기대가 크다.

한달뒤에 있을 우리나라 새 대통령의 취임행사에 어떤 문화이벤트가 곁들여질 것인지는 전혀 내비쳐진 것이 없다. 지금까지는 자칫 시인이 올라가 축시라도 읽었다가는 단박에 어용시인으로 규탄당할 분위기의 취임식이었다. 군사정권의 정당성여부 때문일 수 있었다.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시를 잃어버린 기간은 꼭 우리의 군사정권시대와 일치한다. 이제 문민시대를 맞아 우리도 단상의 시인에 대한 어용의 혐의는 해제될 때가 되었다.

시인을 처음으로 취임식에 내세운 케네디는 예술의 각 분야에 두루 취미를 가진 대통령이기는 했다. 미국 대통령의 기초적 소양으로 문화가 고려되는 경향이 생긴 것은 그 때부터다. 부시 전 대통령도 문학작품에 대한 이해가 높고 컨트리뮤직과 오페라를 좋아했다. 프랑스에서는 대통령들이 드골이래로 미테랑에 이르기까지 문필가들이고 그 중에서도 퐁피두는 문학교수 출신이었다.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만해도 체호프를 특히 애독하는 문학애호가로 소문나 있다. 우리나라의 김영삼 차기 대통령은 중학시절 한때나마 소설가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이광수의 「흙」 「사랑」을 탐독했고 지금은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이 애송시라고 한다. 이미자,패티킴을 좋아하고 서양음악은 세미클래식을 즐긴다고 보도되었다.

취임식의 행사내용이나 개인의 취향만 가지고 대통령의 문화에 대한 의식이나 의지를 단정하지는 못한다. 문화를 키우기 위해 대통령이 반드시 문화예술의 전문가일 필요는 없다. 다만 문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는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문화예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있는 편이 낫다는 것 뿐이다.

김영삼 차기 대통령의 내세우는 지도이념은 「신한국의 창조」다. 이를 위해 「신정치」 「신경제」를 외치지만 「신문화」란 말은 없다. 문화는 섭섭하다.

경제 재건이 최우선 과제라고 한다. 대관절 무엇을 위한 경제인가. 경제는 쉬운 말로 잘 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잘 산다는 것은 문화적으로 잘 산다는 뜻이다. 경제는 결국 문화가 궁극적인 목적이다. 문화를 지표로 하지 않는 경제는 맹목의 경제다. 눈먼 부는 오히려 사회를 퇴폐시키는 요인이 된다.

문화는 경제의 목표일뿐 아니라 문화 자체가 경제의 한 영역이요 수단이기도 하다. 재화를 생산하는 것만이 경제가 아니다. 문화를 생산하는 것도 경제다. 소득의 분배만이 경제가 아니다. 문화의 분배도 경제다. 경제수준이 문화수준에 영향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문화없이 경제도 없다. 「신경제」는 문화의 지원없이 혼자 발전하기 어렵다.

문화를 지향하지 않는 비문화적 경제가 바로 오늘날 우리의 소위 「한국병」을 낳았다. 한국병의 병인은 문화적 영양실조에 있다. 모든 사회적 병리는 문화의 결핍에서 생긴다. 문화는 사회의 영양제다. 한국병의 치유는 정치만으로는 안된다. 근치는 결국 문화가 해야 한다.

정치가와 예술가의 재래식 구분은 정치가가 다수 인간을 위한 눈에 보이는 형식의 행복을 생각하는데 비해 예술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개인의 정신적 행복을 추구하는데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정치와 예술은 대립개념이 아니다. 많은 문인·학자들과 교유했던 프러시아의 영주 프리드리히 2세는 『나라안에 아름다운 학예가 뿌리내려져 있는 것은 국가에 현명한 정치가 행해지고 있다는 증거다』라고 말했다. 문화는 정치의 척도다. 그리고 문화는 경제뿐 아니라 정치의 원동력도 된다. 영국 국민의 응집력은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에서 나왔고 프랑스 혁명은 보마르셰의 「피가로의 결혼」을 초연할 때부터 사실상 시작되었다고 말해지기까지 한다. 뛰어난 예술적 창조력을 가진 정신은 정치적·사회적 상태를 끊임없이 변형시킨다. 이 문화정신이 변화를 추구하는 「신 정치」에 절실히 요청된다.

「신한국」은 개혁의지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문화에 대한 의식의 개혁이 그 첫걸음이요,그것이 곧 「신문화」다.<본사 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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