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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비상걸렸다(부패와의 전쟁: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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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비상걸렸다(부패와의 전쟁:3)

입력
1993.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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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찍과 당근 홍콩의 행정/반부정 선언 「총독청의지」 초강경/공무원 외부와 식사도 꺼려/공무원 처우개선 병행… 「생계성 부패」 근절/행정업무 가급적 우편처리 오해소지 없애【홍콩=유동희특파원】 신흥공업국(NIES) 또는 아시아의 4소룡으로 한국과 한묶음으로 분류되는 홍콩이지만 이 곳의 「체감부패지수」는 확실히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다.

홍콩근무가 5년째인 한 상사원은 자신의 사무실에 한차례도 홍콩 정청의 공무원이 찾아온 적이 없다고 말한다. 취급상품의 위조품 단속요청문제로 세관공무원과 딱 한번 만난 적이 있지만 식사정도 대접했을뿐 더이상의 「성의」는 필요없었다.

홍콩거주 25년째로 무역업에 종사하는 한 교민은 무역관계 서류를 들고 직접 관계부처를 찾은 것이 한반도 없다. 사환을 시켜 접수시키고 48시간뒤 사환을 시켜 찾아왔을 뿐이다.

공무원사회 뿐만 아니라 민간분야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홍콩사회가 원래부터 이처럼 맑았던 것만은 아니다.

홍콩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교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60년대말 이곳에서도 우리나라의 급행료에 해당하는 「킥백 머니」(Kickback Money) 「언더테이블머니」(Under the table Money) 등이 횡행했었다.

공무원사회에서는 경찰과 공공사업 부문을 관장하는 PWD(Public Works Department)의 부패가 가장 악명높았다.

홍콩에서는 금지된 도박장이 범죄단과 유착된 경찰의 묵인하게 버젓이 개설되는가하면 마약거래에 관여한 경찰관까지 있었다.

또한 우리나라 건설부에 해당하는 PWD가 관계하는 공사마다 뒷거래 의혹이 무성히 제기됐다. 그래도 공무원사회의 부패는 음성적이었던데 비해 민간부문의 부조리와 부패는 거의 공공연했고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물건의 납품과 거래 등에 으레 뒷돈이 오고갔으며 이에 대해 공무원들과는 달리 죄의식도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패의 관행이 일소된 계기는 70년대초 총독직할의 정부기관으로 ICAC(Independent Commission Against Corruption)가 설립되면서 부터이다. 사회전반에 만연한 부패를 거듭 경고해오던 홍콩정청이 「영국정부의 명예를 걸고」 부패퇴치를 위해 설립한 이 기구는 인적구성에서부터 세심한 신경을 썼다.

홍콩과 연고가 있는 인사를 피하기 위해 영국·호주 등지로부터 경찰과 검찰관계 인사들을 차출,홍콩과 연고가 없는 인물들로 진용을 짰다. 또한 ICAC의 조사대상을 공무원만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민간부문까지 확대시켰다. 다시말해 민간은행,심지어 사기업의 부패관행마저 ICAC의 조사대상으로 삼았던 것.

ICAC는 홍콩 각지에 신고센터를 설치하고 홍보를 위해 초기에는 각 지역을 순회하며 주민대상으로 각테일 파티를 열기도 했으며 TV광고를 통해 일반인들의 고발정신을 부추기기도 했다. ICAC의 TV광고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활동을 시작한 ICAC는 「송사리」만 잡던 과거와는 달리 현직 검사·경찰 고위간부·변호사 등의 「대어」들을 줄줄이 낚아냈다.

ICAC의 활동이 얼마나 지독했던가는 ICAC가 활동한지 몇년뒤인 75년께 현직 경찰관 2백여명이 ICAC 청사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였던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시위경찰의 주장은 경찰업무를 너무 깊이 파고든다는 것. 해도 너무한다는 항의였다.

홍콩사상 초유의 경찰데모에 홍콩정청은 경찰의 의사를 청취하고 또 시위참가 경찰관을 처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등 일부 양보를 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경찰의 판정패였다.

ICAC의 반부패 캠페인은 이 사태후에도 결코 위축되지 않고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홍콩정청이 「채찍」만 휘두른 것은 아니다. 부패척결 작업과 동시에 공무원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는 「당근」도 물려주었다.

현재 홍콩 공무원의 보수는 중상급 수준이다. 특히 장기근속자들에게 주택을 제공해 보수수준이 높은 사기업에 근접시키려는 각종 지원책을 계속 펴왔다.

우리나라 과장급 정도가 되는 근속 공무원일 경우,정청으로부터 18∼20평 규모의 아파트를 제공받든가 그에 해당하는 주택수당을 받아 자기 수준에 맞는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다.

또한 같은 공무원중에서도 경찰관과 이민국관리 등 민원부서 공무원의 보수를 높게 책정,「생계성 부패」의 싹을 없애버렸다.

ICAC 활동이후 홍콩 공무원들은 모든 업무를 가급적 우편을 통해 처리하려하고 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관계인을 부르지 않는다. 식사대접마저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며 거절하기 일쑤다.

홍콩의 건물들은 설계보다도 더 단단히 지어진다는 색다른 전통이 서게 된 것도 ICAC 활동이 거둔 성과중의 하나이다. 아파트 건축의 경우,입주허가(Occupation Permit)를 내주기전 임의로 한 부분을 뚫어보아 당초 설계대로 하지 않았으면 입주허가가 나지 않는 것은 물론 심하면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도록하기까지 하고 있다. 때문에 입주허가 검사에 통과하기 위해 아예 건설 당시부터 설계보다 더 단단하게 짓는 전통이 생기게 됐다. 여기에는 또 입주허가가 나지 않을 경우,건축업자와 공동책임을 져야하는 감리회사가 철저하고도 가혹하게 공사과정을 감시하는 것도 중요한 몫을 한다.

17∼18년전의 일이지만 한국의 조선공사가 홍콩진출 첫 건설사업으로 중국 국경 가까이에 있는 「판림」(Fanling)이란 곳에서 4백만달러짜리의 하수도 처리공장을 맡아하다가 감리 때문에 호된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공사가 절반쯤 진행됐을 때 공사를 감리한 감리회사는 설계대로 공사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때까지 공사한 것을 모두 철거하고 처음부터 다시 공사를 시작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조선공사측은 너무 가혹하다며 이의를 제기했으나 결국 감리회사의 말대로 그동안 공사한 것을 모두 철거하고 완전히 새로 공사를 해야했다.

홍콩에서 부패척결이 가능했던 요인중의 하나는 홍콩이 식민지인 만큼 홍콩내 각종 이익집단의 압력에 총독을 비롯한 정청의 지도부가 초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처럼 ▲서류만으로도 모든 행정처리가 가능하도록 한 것 ▲공무원 처우개선을 병행시킨 점 ▲공사후의 철저한 사후감독 등은 우리도 본받을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된다. 이중에서도 편지를 통해서도 거의 모든 행정사무가 처리될 수 있도록 행정체계가 자리잡힌 것이 민원공무원의 부정을 방지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홍콩에서 ICAC를 설립하는 등 반부패캠페인이 한창일 당시 한국인이 관련된 일화 한토막도 있다.

홍콩에 온지 얼마 안되는 한 한국인은 이민국 관리가 하도 친절하게 일처리를 해준 것이 고마워서 미화 1백달러를 감사편지와 함께 담당자에게 편지로 우송했다. 그런데 이 편지가 ICAC 당국에 적발돼 관련 공무원이 쫓겨나는 사태가 빚어졌다. 자신의 「성의」가 엄청난 결과를 빚은데 놀란 이 한국인은 요소요소를 찾아다니며 구명운동을 폈다고 한다. 유감스럽지만 이 한국인의 「정성」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후일담은 없다.<홍콩=유동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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