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지역이다. 가장 빠른 경제성장,가장 고무적인 정치 민주화,가장 광범위한 근대화,이 모든 것이 지금 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다.세계에서 아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혁명적인 속도로 증대되고 있다. 1960년에만 해도 아시아지역의 GNP는 세계 GNP의 4%에 불과했으나 1990년에는 25%에 이르렀으며 2000년대에는 세계 GNP의 3분의 1을 초과할 전망이다.
이러한 추이가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근대에 들어오면서 과학에 기초한 서양의 산업화로 세계역사의 중심무대로부터 밀려날 수 밖에 없었던 아시아 나라들은 21세기에는 세계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다. 아시아의 발전은 가능한 것이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무엇이 아시아국가들의 발전을 막을 수 있을까?
냉전시대에는 초강대국간의 핵대결로 제3차 세계대전과 같은 세계적인 재앙이 인류역사의 종말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있었다. 그러나 탈냉전시대에 아시아국가들의 미래를 위협하는 요소들은 그 어떤 전세계적인 현상이라기 보다 각 국가들이 놓여있는 개별적 상황속에 내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가령 중국은 현 지도체제 이후에 직면하게 되는 정치적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 오늘의 성장 모멘텀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중앙과 지방간의 권력균형,소수민족의 자치권,그리고 이러한 문제들과 직결되어 있는 민주화문제 등의 숙제를 효과적으로 풀지못한다면 중국의 근대화작업은 한꺼번에 혼란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다.
일본은 미국과의 관계가 어떤 수준이상으로 악화된다면 경제적 타격은 물론 안보면에서도 새로운 독자적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며,그러한 사태는 일본과 다른 모든 나라들과의 관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미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대미관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북한의 변화가 가장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그것은 북한이 점진적으로,그리고 긍정적 방향으로 변화하는 경우에도 그렇고 아니면 돌연히 극적으로 붕괴되는 경우에도 그렇다.
장기적으로 보면 남북한 관계는 어느 때보다도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라는 표현은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을 원하는 한국인 모두를 뜻한다.
남북이 이른바 기본합의서에 조인한지 벌써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그 동안의 의미있는 변화가 일어났다고는 할 수 없다. 남북 합의서에 조인했을 때 남한측 정책책임자들이 어떤 기대를 가지고 「합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그 후에 실질적인 변화가 별로 없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남북관계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판단은 북한이 앞으로 변화를 전적으로 거부할 수는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는 관찰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보도된 바와 같이 중국은 북한에 대해 모든 교역관계에서 경화결제를 요구하고 있다. 러시아는 이미 북한과의 모든 경제관계를 상업적 차원에서 현실화했으며 과거 북한의 대외경제관계의 축을 이루었던 코메콘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제 북한의 마지막 남은 우방인 중국마저 경제관계의 현실화를 요구한다는 것은 북한에 견딜 수 없는 압력이 될 것이 틀림없다. 북한이 경제의 완전한 파탄을 면하기를 원한다면 정치적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어느정도의 개방과 개혁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토크빌이 지적한 것처럼 나쁜 정부는 개혁을 시도할 때 가장 큰 위험에 처하게 된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이 소련 공산체제의 붕괴를 초래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북한의 경우에도 유사한 운명에 처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물론 북한의 붕괴를 예언할 수는 없지만,적어도 북한체제의 붕괴 가능성은 북한의 남침 가능성보다 작다고 단언하기는 힘들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당면하는 북한의 새로운 위협이다.
앞으로 몇년안에 북한이 돌연히 붕괴된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엄청난 시련에 부닥치게 된다. 독일의 예를 인용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구 서독에 비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너무도 여력이 부족하다. 남북한 경제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통합되어야 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한국경제의 미래는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며,그렇게 조성된 경제적 위기는 우리의 정치·외교 등에까지 거의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제2의 안보정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총들고 싸우는 안보가 아니라 북한의 붕괴로 인한 위협으로부터 우리의 미래를 보호하는 정책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제2의 안보정책은 가능한한 북한의 급작스러운 붕괴를 방지하되 만일 붕괴되는 경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위기관리계획을 동시에 준비해두어야 한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북한의 점진적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정책수단을 동원하면서 동시에 북한이 돌연히 붕괴되는 경우에 대비하여 그 경제적,정치적 충격을 최소화하고 통합과정을 조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비상계획도 수립해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기술개발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고 정부기구를 개혁함으로써 민주화,효율화를 추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북한의 붕괴 가능성이 제기하는 새로운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모든 화려한 미래를 위한 계획은 모래위의 성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아시아국가들이 21세기의 주인공으로 출현한다해도 우리 민족은 제2차대전이 종식되었을 때 미리 예상치 못했던 「분단」의 함정에 빠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냉전이 종식되면서 불어닥친 「통일」의 태풍을 예상치 못한 결과로 또다시 성장과 발전의 기회를 놓쳐 버릴는지도 모른다. 정신차려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사회과학원장·전 주미 대사>사회과학원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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