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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키우자」는 제언/이문희(화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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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키우자」는 제언/이문희(화요칼럼)

입력
1993.0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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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들어 한국일보는 「사람을 키우자」는 색다른 주제를 들고 나왔다. 모두가 새 정치,경제회복에 초점을 맞추는 판에 「사람을 키우자」는 좀 엉뚱하긴해도 그 때문에 돋보이기도 한다.기획을 시작하는 대담은 우선 우리가 광범위한 인재 부재현상에 직면해 있으며 그 원인을 다음의 세가지에서 찾고 있었다.

첫째 기성세대의 책임,급변하는 시류에 늘 위기의식을 느끼며 살아오느라 후세대에 자신있게 자신의 비전을 제시해주지도,이끌어주지도 못했다. 둘째 엘리트교육의 부재,특히 5·16이후의 평준화교육,교육실패가 「사람」의 질,사회의 질을 전체적으로 떨어트렸다. 셋째 「존경받는 사람」의 모델이 없는 풍토,일제나 5·16이후 계속된 군사통치같은 역사의 굴절이 1인자외에는 모두가 똑같은 이상평등주의의 만연을 가져왔고 인재의 배양을 더욱 어렵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담은 사람을 키우고,인재를 아끼는 새로운 노력이 있어야겠지만 이것은 기본적으로 다원성이 존중되는 개방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결론처럼 말하고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시중에 무성한 것은 인사얘기다. 신한국의 기치를 건 새 정부의 첫 단추가 바로 어떤 인물로 팀을 짤 것인가에 달려있으니 무성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밖에서는 이런 사람은 되느니 이런 사람은 안되느니 주문들도 많지만 어떤 사람을 택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팀장의 의지요,능력이기도 하다. 『지도자의 품성과 현명함에 대한 가장 손쉬운 식별법은 그의 측근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안다』는 마키아벨리의 말은 이런 의미에서 되새길 값어치가 충분하다.

○아끼는 풍토부터

인재가 있느냐 없느냐는 매우 상대적인 개념이다. 더구나 지금은 영웅의 시대가 아니다. 마치 점지해놓은 사람이 하늘에서 떨어지듯 인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대중속에서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갈고 닦여져 태어나는 시대다. 적소에 마땅한 적재이면 그것이 인재인 것이다.

이같이 인재란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소양에서 출발하지만 그 사회가 그를 인재로 받아들이느냐 하는,수용의 조건도 갖춰야하는 양방의 요건을 필요로 한다. 전문적 식견(Expertise) 못지않게 사회적 인정의 축적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 능력에 따라 편견없이 기회가 주어져 자유로운 경쟁이 이뤄지도록 해야하고 직에 상응하는 권력이 적절히 배분돼 책임을 지는 훈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속에서 인재가 자라고 그것도 사회적 인정을 받으며 자란다면 다원성은 여기에 절로 싹트게 된다.

이런 까다로운 조건들이 인재를 애써 키우고 아껴야 하는 까닭이다. 군사통치로 대표되는 구 시대와 문민의 신 시대가 확연한 구분을 가져야할 부분이기도 하다. 구 시대에선 능력이나 인정에 관계없이 권력자가 지명하면 바로 그것이 「인재」가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권력자의 충실한 명령수행만으로 임무를 다할 수 있었고 보신할 수도 있었다. 여기서 무리와 부패가 싹튼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었다. 경쟁에 의한 동원이 아니라 연에 의한 동원이기 때문에 갈등요인은 늘어만 갔고 총체적인 인재불신,지도자 불신으로 확산되었다. 출중한 개인적인 능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수용이나 인정에서는 불합격되는 절름발이 인재들이 여기서 양산됐다.

○절름발이 인재들

우리가 「사람」에 관해 안타깝게 생각하는 또다른 측면은 사람을 키우지 못한 풍토 못지않게 인재들 스스로가 자신을 지키기에 너무 소홀했다는 점이다. 마치 그 직이 이 세상의 끝인 것처럼 정당과 합리는 도외시한채 오직 권력자만을 안중에 둔 각종 무리로 스스로 만신창이가 돼버린 숱한 「인재」들을 대할 때마다 개인적으로는 물론이요,사회적인 손실이라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예를들어 장관을 지낸 대학교수가 강단에 돌아간다고 하자. 그는 대학교수가 되기위해 쌓은 전문적 지식에다 현장의 경험이란 귀중한 자질을 하나 더 쌓은,이론과 실제를 접할 수 있는 산교육자가 될 수 있다. 실제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산학을 이상적으로 연계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형편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아니 우리 정서가 그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 대학내의 사정은 알 길은 없어도 적어도 학부모의 입장에선 그렇다.

저 사람이 언제 대학교수였나 싶게 권력의 맹목적 수행자가 됐던 사람들을 우리는 지난 30여년간 수없이 보아왔다. 그러나 권력을 위해 일한 것만으로 학교에 돌아갈 수 없다면 그것은 어딘가 잘못된 것이다. 다만 「수범」이라는 교육자로서의 기본요건을 상실했다면 거부권은 학교에,더 나아가 사회에 있다. 「단절이 진정 창조」라면 그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돼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바야흐로 인사의 계절. 어떤 사람을 고르는 가도 중요하지만 어떤 사람을 골라 키우는가도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선택은 가능성의 사람고르기지 결코 시험된 사람고르기만은 아닐 것이다. 구 시대와의 확연한 차별화,개혁의 실천은 이런 용인에서부터 나타나야 한다.<편집담당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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