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등 싼가격 한계… 적자장사/기술개발·품질 제고만이 살길【런던=원인성특파원】 섬유와 신발 등 노동집약적 상품들이 국제시장에서 후발개도국들에 밀려나면서 우리 수출상품의 주종을 이루게 된 것이 전자제품과 자동차이다. 이들 품목은 기술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제 한국산 전자제품과 자동차도 질이 꽤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삼성 금성 등 해당기업에서는 한국의 전자제품과 일제와의 기술차이가 1∼2년까지 좁혀졌다고 주장한다. 현대자동차도 일제와 독일제에 비해서는 아직 떨어지지만 다른 유럽산에는 별로 성능이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이같은 평가는 경제전문지나 외국바이어들도 어느정도 인정하는 대목이다.
지난해 영국 등 유럽시장에서의 전자나 자동차 판매실적을 보아도 이같은 주장이 전혀 과장된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영국시장의 경우 삼성과 금성 두 회사에서 텔레비전 20만대,VTR 13만대,전자레인지 18만대 가량을 판매했다. 한국산의 시장점유율이 텔레비전과 VTR가 6∼7%,전자레인지가 13%가량을 차지했다. 특히 삼성은 팩시밀리시장에 성공적으로 파고들어 15% 가량을 점유,일본기업과 선두다툼을 벌일 정도로 됐다. 자동차도 현대가 쏘나타와 엘란트라를 주종으로 삼아 영국에서만 약 1만5천대를 판매했다. 기아도 프라이드 하나만으로 영국에서 한해동안 4천대를 판매했다.
그러나 이같은 실적이나 기술이 다소 나아졌다는 평가가 자위의 근거는 되지 못한다. 외형상의 판매실적이 한국경제의 현실을 액면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해외시장에서 우리상품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현실은 더욱 암담해질 수밖에 없다.
80년대이후 우리의 가전제품이나 자동차가 해외에서 어느정도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은 가격경쟁력에서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이나 독일·미국제품에 비해 성능은 뒤지지만 값이 싸다는 이점으로 외국의 소비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같은 전략은 애초부터 한계를 안고 있다.
섬유나 완구 신발류 등과 달리 전자제품이나 자동차는 기술수준이 선택의 일차적인 기준이 된다. 품질과 성능이 뒷받침이 된 뒤에나 가격이 유리하다는 이점이 십분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나마 한국산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던 「저렴한 가격」도 이제는 더 이상 빛을 발할지 못한다. 동남아나 중남미의 현지공장에서 생산된 일본제품들이 한국산보다 더 싼 가격으로 공세를 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제품이 경쟁에서 이기려면 동남아산 소니보다 더 싼 값을 유지해야만 한다. 생산지가 어디가 됐건 유수한 일본의 브랜드와 경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가격을 더 낮추는 것 외에 당장 도리가 없다.
지난해 우리의 대유럽 수출은 1백12억달러 가량으로 91년에 비해 오히려 3% 정도 줄어들었다. 이중 전자 및 전기가 36억달러,자동차가 8억달러 정도를 차지했다. 자동차는 대부분 새로 수출시장을 개척했기 때문에 높은 증가율을 보였지만 전자와 전기제품은 1년전보다 9% 이상 줄어들었다. 그나마 수출업체의 대부분이 적자를 면치 못했다. 첨단기술의 잇단 개발과 제3국 생산으로 가격을 떨어뜨린 선진국 제품에 대항하려니 출혈판매를 계속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컴퓨터의 경우에는 일부 업체가 적자장사를 감당하지 못해 판매를 중단하는 사례까지 발생했다. 「많이 팔면 팔수록 장사는 오히려 손해」라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실정이다.
실상이야 어째됐든 한국상품은 일제 등에 비해 질이 떨어진다는 이미지가 외국소비자들에게는 깊이 박혀있다. 런던시내의 토튼햄코트가에 있는 전자상가를 둘러보면 우리 전자제품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가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이곳의 상점들이 취급하는 제품은 90% 이상이 일제이다. 몇군데를 돌아다녀야 겨우 가뭄에 콩나듯 네덜란드산 필립스와 한국산 일부를 발견할 수 있다. 한 상점에 들러 팩시밀리에 관해 문의하자 캐논 등 일제 몇가지와 국산 한가지를 내놓는다. 캐논은 가격이 비싼 대신 품질을 보장할 수 있고 한국산은 값이 싸다는게 점원의 설명이다. 한국산의 품질이 어떠냐고 묻자 그런대로 우수하다고 대답한다. 팩시밀리는 그래도 대접을 받는 편에 속한다. 텔레비젼이나 VTR 오디오 등을 요구하면 점원들은 일본제품만을 내놓는다. 손님이 싼 제품을 요구해야만 한국산을 내미는 식이다.
자동차의 경우에도 크게 사정이 다르지 않다. 유럽에서 자동차의 수명은 평균 10년을 웃돈다. 첫 소비자가 3∼4년을 쓴 뒤부터는 중고차 시장을 전전하게 된다. 따라서 중고차가격이 어떻게 형성되느냐는 새차의 가격과 판매에 큰 영향을 미친다. 비슷한 수준의 차라도 국산은 3∼4년이 지나면 중고차 가격이 경쟁차량의 절반 가까운 수준으로 떨어진다. 내구성도 뒤질뿐더러 부속장치의 잔고장이 잦고 애프터서비스나 부품구입 등에 애를 먹기 때문이다. 지난해 프랑스에서는 국산차를 구입한 소비지가 고장난 창문의 부품을 못 구해 이웃나라까지 연락해 고친 일도 있었다.
한국산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광고에 공통적으로 따라붙는 문구는 『품질도 우수하지만 가격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한국산은 값이 싼제품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이미 세계시장을 확고하게 독점하고 있던 선진국기업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전략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이같은 이미지가 한국상품의 수출과 판매를 늘리는데 가장 큰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한국상품을 취급하는 현지 상인이나 소비자들의 인식도 비슷하다. 한국산은 어중간한 제품이라는 것이다. 미·일·독 등의 제품에 비하면 분명히 기술수준은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아주 저급품도 아니라는 게 바이어들의 공통적인 평가이다. 하지만 기술수준이 선진국의 90% 수준에 이르렀다고 해서 그만한 가격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한국상품은 일제 등에 비해 70%선의 가격수준을 맴돌고 있다. 우리 기업들은 제값만 받아도 한결 낫다며 제품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광고 판촉에도 신경을 쓰고 있지만 근본적인 대안이 되기는 힘들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는 전자나 자동차산업에서 중급품이 설자리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기술개발에 투자하고 품질을 높여 당당하게 경쟁하는 것 말고는 돌파구는 없다. 첨단기술산업에서 2류는 허용되지 않는게 엄연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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