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생활 전체가 「수난의 연속」/현대사 질곡속 민주화 투쟁 부단한 몸짓/투옥·망명·연금등 가시밭 삶/“참된 인생위해 평생노력” 자평김대중 전 민주당 대표는 6일 의원직 사퇴서가 수리됨으로써 파란만장한 의정활동을 공식 마감했다.
40여년간 걸어온 정치인의 길에서 비켜나 역사속에서 거듭나기를 모색하고 있는 김 전 대표에게 우연의 일치이긴 하나 사퇴서 수리 날짜가 68회 생일과 겹쳤다. 김 전 대표에게는 이날이 「끝이 곧 시작」임을 일깨워주는 착잡하고도 뜻깊은 날이 될 것 같다.
김 전 대표는 이날 아침 동교동 자택에서 의원직 사퇴에 언급,『의원직을 시작할 때도 3일만에 5·16을 맞았고 그만둘 때도 역시 복잡했다』고 의정생활 전체를 「수난의 연속」으로 요약했다.
스스로를 「타협과 협상을 즐기고 현실을 중시하는 의회주의자」로 평가하는 김 전 대표가 「의회인 김대중」의 모습 대신 투쟁가적인 면모를 띠어온 것은 바로 그를 줄곧 포위해왔던 척박한 정치환경에서 비롯되었다고 봐야 한다. 김 전 대표는 결국 한국 현대정치사의 굴곡을 그대로 몸에 새기면서 그 음습한 그늘을 떨치려 부단히 몸부림쳐왔고 그 몸부림이 또한 우리 정치사의 한줄기를 이뤄왔던 셈이다.
확고한 신념과 뛰어난 현실감각을 바탕으로 대화와 절충의 묘를 한껏 살렸을 그의 의회주의자적 면모는 세번의 잇단 고배끝에 61년 5월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을 때부터 외적 제약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당선 3일만에 5·16으로 국회가 해산돼 천신만고 끝에 이룬 금배지의 꿈이 물거품이 돼버린 것과 함께 군사정부에 의해 투옥돼 두달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듬해 3월에는 정치활동을 금지당했고 곧이어 또 한차례 감옥살이를 해야했다. 박정희와의 악연은 이때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63년 2월에 해금된 그는 민자당 재건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11월의 6대 총선에서 고향인 목포에서 뒤늦은 정치적 입신에 성공했다.
「의회인 김대중」의 진가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발휘됐다. 왕성한 독서와 실물경제 경험을 바탕으로 경제통으로 부상했고 대변인을 맡아 발군의 의정활동을 계속했다.
특히 64년 김준연의원 구속동의안을 놓고 5시간19분동안 물한모금 안마시며 행한 그의 연설은 힘의 논리가 아니라 대화와 설득으로 의정을 끌어가야 한다는 의회주의자적 면모를 부각한 대표적인 예였다.
김 전 대표는 7대 총선에서 국무회의를 목포에서 여는 등 박정희정권의 집요한 낙선공작을 극복하고 당선돼 정계의 스타로 부상했다. 그리고 양김시대를 열었던 70년의 신민당 후보경선에 서 경쟁자 김영삼씨를 누르고 막판 역전승을 거두는 등 한때 승승가도를 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71년 대선에서 박정희대통령에 맞서 46%를 득표하고 패배한 이후의 정치적 시련은 더이상 「의회인 김대중」의 면모를 온전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3번의 지역구 당선이후 8대 때 전국구 의원으로 다시 의사당에 발을 디뎠으나 유신으로 또다시 도중하차해야했고 투옥과 망명 살해위협 연금 정치규제가 잇달아 반복되면서 계속 제도권 밖에 머물러야 했다.
87년의 사면복권에 이르기까지 그의 무려 16년간 장외에 「갇혀」있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이 기간은 그에 대한 갖가지 너울들,「용공이다」 「과격하다」 「믿을 수 없다」는 등의 오해가 덧씌워진 때이기도 했다.
88년 13대 총선에 전국구 의원으로 실로 오랜만에 의정생활을 재개하고 나서도 정치상황은 순탄하지 않았다. 13대 전반기의 여소야대 정국은 잠시 국민들에 「국회」의 의미를 일깨웠으나 3당 합당이후 김 전 대표는 다시한번 의회주의와는 거리가 먼 힘의 논리에 부딪친다.
결국 김 대표는 자신에 대한 평가를 역사에 맡겼듯이 의정생활에 대한 평점도 헌정사에 신탁한채 수난으로 얼룩진 의정생활을 마감한 것이다.
사퇴서 수리에 앞서 5일 김 전 대표를 만난 박준규의장은 『우리 의회의 영광과 고난을 함께한 의회정치사의 산증인이며 민주화의 기수로서 이 나라 민주주의를 한차원 더 발전시킨 자랑스런 의회인』이라고 평가하며 이례적으로 기념패를 전달했다.
박 의장의 이같은 평가는 아직 김 전 대표가 유념하는 역사의 평가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지만 「의회인 김대중」의 진면목을 복원하는 첫걸음은 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비록 정치를 떠난 입장이긴 하나 김 전 대표가 앞으로 직·간접적인 조언을 통해 바른 의정상 정립에 기여할 것이란 기대도 적지 않다.
「의회인」의 삶을 일단 마감한 김 전 대표는 5일 민주당 출입기자단과의 만찬을 시작으로 9일까지 당주변과 언론계 인사들과의 위로모임을 통해 정계은퇴에 따른 주변정리를 마친뒤 이달 하순 영국 연수길에 올라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연구 교수자격으로 3∼6개월동안 EC 통합과 독일 통일의 과정을 가까운 거리에서 살피면서 국제정치와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한 오랫동안의 식견을 정리할 계획이다.
김 전 대표는 연구와 저술 강연활동을 3위1체로 묶을 수 있는 연구소를 개설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으나 구체적 방안은 영국에서 귀국한뒤 결정할 생각이다.
김 전 대표는 5일 민주당 출입기자들과의 고별모임에서 『나는 그동안 무엇이 되는데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어떻게 사느냐에는 충실하려고 노력해왔다』고 자신의 정치역정을 스스로 조명했다. 그는 이어 궁형의 수모를 감내하며 사기를 남긴 후한의 사마천을 예로들며 『단순히 경험을 엮은 것이 아니라 학문적 바탕과 사관을 갖춘 한국 현대정치사를 써볼 생각』이라고 의욕을 보였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역사에 맡긴 김 전 대표의 이같은 발걸음은 역사란 사람이 만들어가는 측면도 있음을 새삼 일깨워준다.<황영식기자>황영식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