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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취제없는 수술/정달영(화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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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취제없는 수술/정달영(화요칼럼)

입력
1992.1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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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느낌을 주는 일들이 있다. 김영삼 대통령당선자가 예정됐던 당선 축하잔치를 취소하도록 한 것이나,경호상의 이유를 들어 권고받았던 청와대 부근의 「안가」입주를 뿌리친 것 등이 그것이다.불안한 느낌을 주는 장면들도 없지 않았다. 당선 확정된 날 아침 TV로 중계된 기자회견에서 「부산 기관장 모임」의 처리를 동문한데 대해 「국민의 사생활 보호」로 서답한 것이 그 것들중의 하나다.

하기는 그뒤 전개되고 있는 검찰의 수사진행으로 미뤄 동문서답 아닌 우문현답이었음이 드러나고 있으니 할말은 없다.

분명한 것은,신선한 일이건 불안했던 일이건 그것들이 김 당선자의 정치적 「감」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감」은 과연 탁월한데가 있다는 것도 새삼스런 느낌이다. 더러 불안해 보이기는 하지만,그렇게 불안한 점까지를 그의 지지자들은 좋게 여기고 있으니 그 점도 할말은 없다.

정말 신선하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은 대목은 김 당선자의 당선 회견문에 들어있다. 그가 국민들에게 감히 「고통의 분담」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신한국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기적처럼 오는게 아닙니다. 피와 땀과 눈물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이제 위대한 한국인의 혼을 되살려 다시 뛰어야 합니다. 저는 국민 여러분께 고통의 분담을 요구하고자 합니다. 저도 고통스런 먼길을 앞장서서 뛰겠습니다」

유세기간중에는 좀처럼 상상을 할 수 없었던 소리이다.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만들어 올리겠습니다」로 일관하던 장미빛 공약들과는 판이하다. 당선자의 자리에 서자마자 얼굴을 바꿨다.

「피와 땀과 눈물」을 차용한 것으로 미뤄 그는 2차대전중 총리에 취임한 윈스턴 처칠의 기분이었다. 저 유명한 JF 케네디의 30여년전 연설과도 분위기가 비슷하다. 「조국이 그대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지를 묻기에 앞서 그대가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먼저 물어보라」

그러나 그의 고통분담 요구는 아직 수사의 차원이다. 적어도 아르헨티나의 메넴 대통령의 3년전 취임식에서 외쳤던 말에 비하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아르헨티나 국민 여러분,저는 지금 이 순간부터 마취제없는 수술을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메넴은 무섭게 선언했었다. 그리고 그가 1차로 「수술」한 것은 전 공무원의 봉급을 25% 삭감한 「제살깎기」였다. 각 부문에 걸친 메넴의 과감한 개혁과 정면돌파가 그뒤 3년이 지난 지금 아르헨티나를 경제파탄의 수렁에서 건져냈음은 알려진 일이다.

메넴의 「마취제없는 수술」이 가능했던 것은 국민의 합의와 지지,그리고 인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김 당선자의 고통분담 요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국민적 합의와 지지를 먼저 얻지 않으면 안된다. 국민이 들어주지 않는 요구라면 그것은 책상위에 나뒹구는 휴지쪽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국민의 합의를 설득하기 위한 몇가지 조건이 제기된다. 어떻게 해야만 고통의 분담에 국민이 흔연히 동참할 것인가. 덜 먹고 덜 쓰고 세금 더 내고 일 더 많이 하라고 하는 「고통」을 국민이 두말없이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무엇부터 해야할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김 당선자 자신의 「변화」이다. 그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그야말로 「몰라보게」 달라지지 않고서는 국민을 설득하기 어렵다. 국민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그 자신이 무엇부터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결단해야 한다. 만약에 자신의 변화는 별 것도 없는 상태에서 국민에게만 일방적으로 희생과 고통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국민의 저항을 부를 뿐이다. 이런 상황은 김 당선자 특유의 정치적 「감」이 용납하지도 않을 것이다.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사실 우리나라만의 명제가 아니다. 미국과 유럽,동구권을 비롯한 지구촌 구석구석의 명제가 일제히 「변화」이다. 우리보다 한달먼저 선거를 치르고 「변화」를 선택한 미국은 하나의 타산지석이다.

김 당선자의 솔선수범은 김 당선자를 포위하고 있는 우리의 사회의 견고한 기득권 세력의 총체적 변화를 수반하지 않고서는 무의미하다. 그들이 먼저 희생하고 양보해서 손을 내밀어야만 국민은 비로소 「한번 더 속는 셈치고」 고통을 분담하겠다는 자세를 갖추게 될 것이다. 따라서 김 당선자가 할 일은 자명해진다. 그 자신의 변화·개혁과 함께 윗물에 해당하는 기득권 세력의 생각과 행동을 맑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하는 수단이 「마취제없는 수술」이다. 제 살을 도려내지 않고는 어떤 변화도 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

김 당선자는 도려내야 할 「제살」을 감잡기 바란다.<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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