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의 순환」은 86년에 나온 책이다. 저자는 케네디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을 지냈고,두차례 퓰리처상을 받은 원로사학자 아더 슐레진저 교수.그는 만년의 이 대저에서,미국역사에 30년 주기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요컨대,30년쯤을 한 사이클로 해서 보수와 진보가 교대한다는 것이다.
근래의 예를 들자면,1910년대 윌슨 대통령의 이상주의는 30년대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으로 이어지고,다시 60년대 케네디 대통령의 뉴프론티어 정신으로 이어진다. 그 사이에 간주곡처럼 보수주의 연대가 끼어들며,이렇게 보수와 진보가 한번 순환하는 기간이 30년쯤 된다.
이 30년 주기에 대한 설명은 다분히 세대론적이다. 젊어서 진보의 세례를 받은 세대가 집권할 무렵,앞서의 진보적인 기풍이 되살아난다. 20세기초 미국의 진보적인 기풍이 루스벨트의 30년대를 낳고,그 30년대가 다시 케네디의 60년대를 낳는다.
따라서 케네디이후 다음의 순환주기가 90년대초에 시작되리란 것은 당연한 짐작으로 된다. 그 주역은 젊어서 60년대 미국의 격동을 경험한 세대,40년대 후반에 태어난 베이비붐세대일 것이다. 그 전형이 바로 미국의 새 대통령 빌 클린턴이다.
그의 등장으로 슐레진저의 「예언」은 적중이 됐다. 그 예언대로 하면 미국이 지금 「변화의 연대」로 접어든 것은 하나의 필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슐레진저 투의 30년 주기설이나 세대론이 우리 현대사에 그대로 타당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역사의 왜곡과 정체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의 체험은 세대론적 10년 주기설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전쟁뒤,4·19에서 5·16으로 이어지는 대변혁,10월유신,10·26에서 5·17에 이르는 격동이 대개 10년 간격으로 일어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지금 새로운 변화주기를 맞고 있음을 예감한다고 하겠으나,10년 주기로 일어난 이들 사변의 세대론적 의미는 무엇일까.
맨먼저 떠오르는 것은 한글세대다. 이들의 최선두 그룹인 「한글세대 1기」는 일본 교육을 받지 않은,그러니까 해방직후에 취학한 연령층이다. 이들이 대학생으로 성년을 맞을 무렵 4·19가 일어난다. 이른바 4·19 세대의 등장이다. 이들보다 한바퀴 젊은 「한글세대 2기」는 전쟁뒤의 베이비붐 세대로 대표된다. 70년대 반유신의 주력이며,80년대 「서울의 봄」을 연출한 세대다.
여기 나타나는 하나의 패턴은,한세대의 선두가 청년기에 이르면,그들이 사회변동의 형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변화욕구는 생생한 폭력에 의하여 번번이 무산된다.
이처럼 이들 세대에 공통된 것은 고양과 좌절의 엇갈린 경험이다. 그런 가운데,그들은 사회변혁 세력이라는 자부심을 간직하고 있다. 해방전 세대와 한글세대를 구분하는 세대의식이 뚜렷하다. 중년들어서도 구 세대란 인식이 별로 없다. 그래서 세대교체의 욕구 또한 강하다.
이런 한글세대가 지금 30대 후반에서 50대 전반에 걸친 연령층이다. 우리 사회의 중심이며 중산층의 핵심이다. 이들이 움직였을 때,86년 「6월항쟁」은 6·29선언을 이끌어낼 수가 있었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이다. 이번 대선의 향방을 결정한 것도 이들이다. 새해 새 정부의 성패도 이들이 평가하기에 달렸다고 해서 틀림이 없다.
그런 만큼 이들 우리 사회의 중심세대가 이번 대선결과를 어떻게 보느냐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들의 경험과 성향에 비추어,그들은 단순한 안정희구세력이 아니다.
그들이 보기에,이번 대선결과는 반지빠른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선거로 문민시대를 열었으나,세대교체의 선택지는 거의 주어지지를 않았다.
그들은 「안정속의 개혁」이란 표방이 자가당착임도 잘 안다. 그러면서도 「안정속의 개혁」을 선택한 것은,또 다른 표방인 「강한 정부」 「깨끗한 정부」에 개혁 가능성을 기대한 때문이다. 그 선택의 무게는 「개혁을 통한 안정」쪽에 실려있다고 해야 옳다.
또 그들은 이번 대선결과가 그 자체로 완결이 아님을 더 잘알고 있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과도기의 시작이다. 노태우대통령의 5년이 군사통치로부터 이탈하는 과도기였다면,김영삼대통령의 5년은 민주화의 완성을 향한 과도기에 해당한다. 의당 과도기적인 혼란과 유동이 예상되지만,혼란과 유동은 우리 사회 중심세력의 중심기능으로 극복할 수 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그만한 자신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새 정부가 펼칠 개혁작업의 안목이 어떠해야 할지는 뻔하다.
그것은 곧 과감한 개혁이다. 과감하되,세대교체를 대신할 만큼 참신해야 하고,혼란과 유동을 최소화할 수 있을 만큼 재빨라야 하며,사회 중심세대가 납득할 만큼 합리적이어야 한다.
낱낱의 개혁 프로그램은 구상과 여론수렴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지만,그 요체는 「40대 기수론」 한마디로 요약될 수가 있다. 새 대통령은,그가 「40대 기수론」을 펼 당시의 40대가 아니라,오늘의 40대이들을 중심한 한글세대의 「기수」가 되라는 것이다. 생리적 세대론이 무색할만한 개혁자세가 아쉽다는 얘기다.
슐레진저의 30년 주기설이 어디까지 타당한지는 알 수가 없으나,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변화주기는,그가 예언했던 미국의 변화주기,그리고 온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전환기적 상황과 공명하듯 절묘하게 일치하고 있다.
새삼 세계사의 진운이 변화속에 있음을 실감한다. 새해,새 시대의 문턱에서,우리가 감당해야 할 변화의 역사성을 다시 생각한다.<상임고문>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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