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9천5백업체 도산/경영자 잇단 자살… “소리없는 절규”올해들어 쓰러진 기업이 9천5백개나 된다. 그 모두가 중소기업이다. 이런 추세로 나가면 올해중 부도로 쓰러지는 기업이 1만개를 넘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사상 최악의 기록이다. 88년의 부도업체수가 3천5백73개,89년 3천2백38개,90년 4천1백40개,91년에 6천1백59개였던 것과 비교해 볼때,또 지난해 연간 부도금액이 3조7천4백5억원이고 올해는 11월까지 6조2천3백94억원,연간으로 7조원이 넘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볼때 지금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중소기업들은 사상 최악의 위기상황을 맞고 있다.
『사업의욕은 꺾이고 기력도 쇠잔합니다. 자금은 고갈되고 신용은 최악의 상태로 떨어지고… 수십만 중소기업이 왜 이 지경인지 철저히 규명하면 그 해답은 저절로 명료해질 것』이라는 「소리없는 절규」의 유서를 남기고 22일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한 정윤현사장과 구천수,우인식,김종일씨 등 중소기업 사장들의 연쇄적인 자살사건은 중소기업의 「위기」를 알리는 경종이고 충격이다.
세계에서 보기드문 훌륭한 중소기업 지원제도를 갖추고 있다는 우리나라에서 중소기업들이 떼를 지어 쓰러지고 대부분의 업체들이 빈사상태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물론 잇단 중소기업인의 자살이 모두 정책의 잘못 때문만이라고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달초 목숨을 끊은 한국기체공업의 구천수사장은 판로를 확보하지 않은채 무리한 시설투자를 해 어려움에 봉착했고 조광정밀의 정윤현사장은 자금동원능력을 무시한채 공장부지를 매입했다가 자금고갈을 초래했다.
그러나 이들 자살한 중소기업인들만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중소기업들 대다수가 전체적으로 한계상황에 봉착해있고 모두가 자살의 충동을 느낄 만큼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다.
금융 관행과 인허가,행정절차,조세제도,노동·환경·보사 등 각 방면에 걸쳐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각종 규제 장치 등등 「마치 중소기업을 못살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온갖 제도와 관습·관행들이 중소기업들의 입지를 흔들고 생명력을 고갈시키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아무리 지원을 확대해도 잘못된 금융관행,외상중심의 거래관행 등 본질적이고도 구조적인 문제가 상존하는 한 중소기업의 생존환경은 개선될 수 없다. 중소기업의 목을 조이는 가장 구조적인 문제가 금융관행이다. 중소기업이 일반대출은 물론 정부의 정책자금을 대출받으려해도 반드시 담보가 요구된다.
유망한 기업이라해도 담보가 없이는 한푼도 대출받을 수 없는게 현실이다. 대신 기업의 성장전망과는 관계없이 담보능력이 있는 기업은 얼마든지 자금을 대출받을 수 있다. 이런 풍토에서는 돈벌어서 부동산에 투기한 기업에 돈이 흘러들어가고 기술개발 등에 열심히 투자한 기업들에게는 돈줄이 막힐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정책금융을 확대하고 중소기업 의무대출비율을 높이고 금리를 내리더라도 돈의 흐름이 바뀔 턱이 없다.
여기에 고질적인 외상거래가 가세해서 중소기업을 빈사지경으로 몰아넣고 있다.
기협중앙회가 23일 발표한 중소기업의 영업실태조사에 따르면 판매대금을 전부 현금으로 받는 기업은 5.9%에 불과하고 나머지 93.1%가 어음 등의 외상거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상판매대금의 회수기간도 평균 90일 이상이 절반을 넘어 중소기업들은 기술개발이나 시설투자는 커녕 기본적인 운영도 어려운 형편이다. 원자재 공급업체·원청업체·하청업체·판매업체 등이 외상거래로 뒤얽혀있으니 아무리 경쟁력이 있다 하더라도 어느 한 업체가 도산하면 연쇄도산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중소기업들이 자생력을 갖추기도 전에 국내 시장이 개방되는 바람에 허약한 모습으로 격전장으로 내몰려 패배를 거듭하고 있다.<방민준기자>방민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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